성악하면 많은 사람들이 클래식을 떠올린다. 어렵고 따분하게만 여겨지는 성악과 클래식은 대중들에게는 ‘공부’해야 하는 예술로 각인되어 있다. 하지만 성악은 어렵지 않다. 성악가 고희전 교수가 말하는 ‘클래식’이란 사람들의 행복을 노래할 수 있는 가장 품격 있는 표현방법 중 하나다.(편집자 주)

  독일에서 인정받은 재능

  “저의 목소리로 기쁨과 행복을 주고 힘을 줄 수 있다면 그 길을 가는 것이 예술인으로서의 소임을 다하는 것 아닐까요?” 안성에서 만난 고희전 동아방송대 교수의 올해가 가기 전 실행할 목표다. 그는 실행 목표를 위해 어느 누구보다 바쁜 삶을 살고 있다.

  공대를 다니다 25살의 나이에 음악이 좋아 음대를 지원했다는 고희전 교수. 음악에 대한 자신의 열정을 뒤늦게나마 불태우며 20여년 간 음악에 전념했다. 그는 국내에 만족하지 않고 독일 유학행을 결심했다. 안될 것이라며 만류하던 교수들의 충고를 따르지 않고 막무가내로 유학길에 올랐다. 결과적으로 그에겐 무리 수가 아닌 최고의 선택이 되었다.

   그의 가능성을 알아본 독일 대학원이 그를 받아들인 것이다. 다른 사람들보다 조금은 늦게 음악을 하게 됐지만, 중요한 것은 그의 목소리가 누구보다 특별할 수 있다는 ‘가능성’이 있다는 것, 그것을 독일사람들이 알아봐 준 것이다. 아내와 함께 오른 낯선 곳에서의 유학 생활이 그리 순탄치 만은 않았다. 자신의 음악에 대한 자신감은 있었지만 생계에 대한 걱정을 안할 수 없었다.

  결국 아내와 아이들 먼저 한국에 귀국 후 홀로 유학 생활을 지속했다. 하지만 한국에서 홀로 아이들을 키우고 있을 아내와 가족 생각에 더이상 독일에서의 생활을 고집할 수 없었다. 그렇게 그는 7년여 간의 독일 유학을 끝내고 2012년 귀국했다.

   아직 독일과 음악 공부에 대한 미련은 남아있지만 독일에서 오페라 무대에 서며 승승장구 해 나갔던 그때보다 한국에서 가족들과 함께 보내는 시간이 더욱 소중한 그였다.

  행복을 전하는 성악가

  그는 자신의 고향 안성에 보금자리를 잡았다. 아내와 아이들을 위한 집을 손수 설계하고 건축하며 애정을 쏟았다. 한때는 독일의 오페라 무대에서 열창했던 그가 유치원 아이들의 음악 강사를 하며 생계를 유지해야 했을 때도 가족은 그에게 버팀목이 됐고 힘이 됐기에 그가 해줄 수 있는 유일한 선물은 가족들을 위한 따뜻한 집이었다.

  그렇게 완성한 보금자리에서 그는 또 다른 꿈을 키웠다. 바로 앞서 언급한 ‘예술인들의 사회적 기업’이다. 그가 독일에 처음 가서 떨리는 마음으로 괴테의 시를 해석한 노래를 불렀을 때 독일 교수가 했던 말을 그는 잊지 못한다.

   “당신의 목소리의 질은 남들과 다르군요”

  기술은 가르쳐 줄 수 있어도 타고난 목소리는 어떻게 할 수 없다는 것, 그것은 그의 생에 최고의 칭찬이었다. 어쩌면 그의 삶을 바꿀 수 있게 해준 단 한마디 였을 것이다. “저에게 용기를 주고 음악생활을 지속 하게 했던 원동력이 됐죠. 저 역시 다른 사람들에게 저의 목소리로 기쁨과 행복을 주고 힘을 줄 수 있다면 그 길을 가는 것이 예술인으로서의 소임을 다하는 것 아닐까하는 생각에서 ‘예술인들의 사회적 기업’을 생각했어요. 다행히 뜻이 맞는 지역의 여러 예술인들을 알게 됐고 올 해 말에는 출범할 계획입니다”

  클래식, 인디음악, 재즈 등 다양한 예술인들이고 교수와 뜻을 함께할 예정이다. 그가 말한 올해가 가기 전 이루고 싶은 자신의 소임이 바로 ‘예술인들의 사회적 기업’ 이라는 것을 비로소 실감했다. 처음부터 언급한 ‘예술인들의 사회적 기업’은 그의 음악이야기보다도 중요해 보였다.  앞으로의 그의 음악 활동이 더욱 기대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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