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쁨은 슬픔과 상대적입니다.

  동전의 앞뒷면처럼 늘 함께 있습니다. 슬픔 없는 기쁨 없고, 기쁨없는 슬픔 없습니다. 성경에도 ‘항상 기뻐하라’는 말씀은 있지만 항상 기쁜 일만 있을 것이라는 말은 없습니다. ‘당신이 형통할 것이고 평탄할 것이라’는 말씀은 있지만 ‘항상 평탄한 일만 있을 것이라는 말은 없습니다. 늘 기쁜 일만 있는 그런 삶은 없습니다. 늘 기뻐하는 사람이 있을 뿐입니다.

  우리가 누리는 기쁨은 최소한 몇 사람의 슬픔 위에 세워진 것입니다. 요즘 결혼하는 신랑신부들을 보면 얼마나 행복해 보이는지 모릅니다. 결혼은 사람이 경험할 수 있는 최고의 기쁨 중에 하나임이 분명합니다. 그런데 그 이면에는 몇 사람이 있습니다. 먼저 두 사람을 보내 주어야 하는 양가 부모님과 가족들이 있습니다. 물론 모든 부모님은 자식에 대한 사랑으로 헤어짐의 아픔을 축복으로 승화시켜 내지만, 금이야 옥이야 키운 아들딸을 다른 사람에게 내어 주는 것은 부모에게는 슬픔이 분명합니다. 그러므로 결혼 당사자들은 마음껏 기뻐하며 사랑을 맹새하되, 자신들을 보낸 자들의 슬픔을 헤아릴 줄 알아야 합니다. 사랑하는 엄마 아빠를 늘 기억하는 효도로 슬픔을 싸매야 할 책임이 있다는 것입니다.

  나는 신랑신부들이 결혼식 마치고 피로연으로 시끄럽고 정신없는 저녁을 보내기 보다는, 그 날 저녁 조용히 손을 맞잡고 이런 기도를 올렸으면 좋겠습니다. 

  “하나님 우리 여기 이렇게 사랑의 결실을 이루게 하시니 참 감사합니다. 끝까지 사랑하며 살겠습니다. 그리고 하나님... 부디 한평생 생명 다해 우리를 키워주시고 이렇게 떠나보내는 어머니 아버지의 눈물이 헛되지 않도록 건강함으로 나의 부모님을 지켜 주옵소서. 우리 두 사람도 살아 있는 동안 은혜를 갚으며 그렇게 살게 하옵소서.”

  이 외에도 우리 인생에는 출산, 합격, 당선, 개업 등 크고 작은 기쁨들이 참 많습니다. 그러나 그 기쁨도 누군가의 눈물 위에 세워지는 것들입니다. 성숙한 사람은 기쁨의 자리에서 슬픔을 당한 자들을 헤아리는 사람입니다.

  1964년 7월 6일. 미우라 아야꼬의 빙점이 아사히 신문에서 주최한 소설 공모에 입선하였고 천만엔 상금을 부상으로 받았습니다. 그 일을 시작으로 노벨문학상도 받고 세계적인 문인이 되었음을 생각해보면 그 날은 실로 역사적인 날입니다. 그런데 그 날 저녁 남편이 하나님께 기도를 올린 후에 그녀에게 이런 말을 했다고 합니다.

  “천만엔의 상금을 받고 유명해지면, 사람이 바보가 되지 말란 법도 없지.” 인생의 위기는 기쁨을 누리는 그 자리에서 시작됩니다. 평탄한 길에서 넘어지는 자가 위험한 길에서 넘어지는 사람보다 많습니다. 내가 누리는 기쁨의 이면에는 슬픔을 당한 자의 눈물이 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래야 넘어지지 않고 우리 인생을 행복하게 끝까지 완주할 수 있습니다. 비로소 그 때 ‘유명하기만 한 바보’가 아닌 ‘진실한 지도자’, ‘기쁨의 전도사’로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한 명 준
서정교회 담임목사
감리교신학대학교 연세대학교 세인폴대학교에서 공부하였고
현재 서정감리교회담임목사로서
감신대와 평택대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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