흰 눈이 내려 쌓이는 이 고장의 곡창 소사뜰을 보면서 가끔은 한국 전쟁 때 피난을 가다가 날이 저물어 어느 농가 빈집에서 하루 저녁 자면서 겪었던 일들이 지금도 생생하게 떠오른다.

  우리 국민 모두가 잊지 못할 참혹한 기억으로 남는 6.25 한국 전쟁, 1950년 6월 25일 새벽 김일성의 북한 인민군이 기습 남침으로 시작된 전쟁은 3일 만에 수도 서울을 빼앗기고 후퇴를 거듭하여 낙동강까지 내려가다가 UN군의 참전으로 다시 북진을 하여 서울을 탈환한 것이 9.28 수복(1950년 9월 28일)이다.

  이 승기로 계속 북진하여 압록강까지 갔으나 중공군의 참전으로 다시 후퇴를 하여 서울을 내준 것이 1.4후퇴(1951년 1월 4일)다.

   처음 공산군이 내려왔을 때 미처 피난을 못하고 남아서 그들의 학정에 시달렸던 국민들이라서 1.4후퇴 때는 무작정 남쪽을 향해 피난길에 나섰다. 지게에, 자전거에, 리어카에, 마차에, 필요한 짐을 싣고, 등에도 짐을 지고 나선 피난길의 행렬은 국도를 따라 철길을 따라 길게 이어졌다.

  하루 종일 추운 날씨 속에 걸었던 지친 몸으로 오후 4시쯤 도착한 곳이 지금의 평택 세교동 통복교 입구로 기억된다.

  이 지점에 와서 피난의 행렬은 멈추게 되었는데 그 이유는 이 지역에 주둔하고 있던 영국군이 피난민들을 일일이 검문·검색을 하며 통과시키기 때문이었다. 당시 통복교는 이미 폭격으로 파괴가 되어 통행이 불가능했고 대신 냇바닥에 모래 가마니 징검다리를 놓고 겨우 사람만 건너가게 되어 있었다.

  냇바닥은 갯물이 드나드는 뻘흙인 관계로 소나 마차는 다리와 바퀴가 빠져서 갈 수가 없는 상황이었다. 이렇다 보니 소마차에 짐을 싣고 온 피난민들은 진퇴양난, 발만 동동 구르며 여자들은 넋을 놓고 앉아 울기도 했다. 그렇다고 중 공군의 점령지가 된 고향으로 돌아갈 수도 없는 일. 애지중지하던 소를 벌판에 남겨두고 영국군의 재촉을 받으며 징검다리를 건너야 했다. 이때 검문·검색하던 영국군들은 피난민들의 소지품 가운데 시계나 만년필 금반지 등 귀중품들을 닥치는 대로 빼앗았다.

  이런 과정을 치르며 통복천을 건너 다시 국도를 따라 내려가면서 평택역사가 불에 타고 있는 것을 보았다. 아마도 낮에 폭격을 맞은 모양이다.

  이 당시 평택역사는 지금의 역사 철길 건너편에 있었다. 그리고 시가지도 지금의 원평동 지역에 조성되어 있어서 군청 경찰서 등 관공서가 다 그쪽에 있었고 현재의 평택의 중심가는 거의 논밭이고 초가집 몇 채가 띄엄띄엄 있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날도 저물고 춥고 해서 더 이상 갈 수가 없어 잘 곳을 찾던 중 벌판 가운데 초가집들이 모여 있는 작은 동리가 보여 그곳으로 발길을 돌려 찾아들었다.

  피난 객지 남의 빈집에서 하룻 밤을 자고 나니 밤새 눈이 와서 온 천지가 하얗게 뒤덮였다. 그리고 눈은 계속 내렸다. 눈이 발목이 빠질 정도로 오는 데도 중공군이 뒤쫓아 온다니 더 이상 머물 수가 없어 다시 보따리를 짊어지고 눈길에 빠져가며 남쪽을 향해야 했다.

  당시 중공군은 평택(북위 37도선)까지 남하했다가 우리 국군과 UN군의 추격을 당해 북으로 후퇴를 했다 한다. 그 후 전쟁은 양측의 공방과 전진 후퇴를 거듭하면서 드디어 1953년 7월 27일, 현 휴전선을 군사 분계선으로 하여 3년 여 만에 종식되었다.

  지금 나는 이 고장 평택을 제2의 고향으로 여기며 살고 있다. 어린 중학생 시절 눈 덮인 벌판을 눈속 길에 빠져가며 어른들 따라 피난 가던 그곳, 평택이 오늘날 이렇게 발전된 도시로 변모된 모습을 보면서 특히 겨울철 눈 덮인 소사 뜰과 통복교를 볼 때마다 그때의 모습을 지울 수가 없다. 전쟁의 폐허 위에 이렇게 훌륭하게 건설해 놓은 이 고장 평택.

  이제는 ‘대한민국 신성장 경제 신도시’로 도약하고 있으니 참 격세지감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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