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용래 회장

  “13살부터 시작했으니 64년 정도 된 것 같습니다.”

  해방 직후 우연한 기회에 서울 남사당의 공연을 보게 되었다. 그저 상모 돌리는 것이 멋있어 보여 혼자 실에 돌멩이를 달아 손으로 돌리며 흉내를 냈고 그것이 시작이었다. 한 번은 무동을 탈 기회가 있었다. “지붕만큼의 높이에 올라서니 밑이 까마득하더군요. 아찔했지만 무섭다는 소리 한번 내지 않고 내려오니 어른들이 잘했다고 칭찬을 해주셨죠.” 어린 마음에 기쁘고 좋았다.

  그것을 계기로 64년의 세월 동안 줄곧 농악만을 해오며 지금에 이르게 되었다. “지금은 많이 활성화되어 있고 공연의 한 분야로서 인정받고 있지만 제가 어렸을 때만 해도 별로 환영받지 못했었습니다. 동네를 다니며 마을 사람들이 주는 밥을 얻어먹고 다니기도 하고 때로는 굶기도 하면서 그렇게 힘든 시절을 보냈습니다.” 지금만큼 환영받고 인정받는 직업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계속할 수 있었던 것은 그저 농악이 좋다는... 열정 하나였다. “한국에는 많은 농악이 있습니다. 전국에 국가에서 지정된 6개 팀이 있는데 그중 평택농악이 가히 최고라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조금 특별합니다. 우리의 자랑은 무동이죠.” 시카고와 베트남 러시아 등 평택농악은 1년에 3~4차례 정도 해외 공연을 가진다. 평택농악의 특기이자 자랑인 무동은 보는 이들로 하여금 탄성을 자아낸다.

  “이렇게 해외 공연을 다니다가 같은 한국 사람들을 만나게 되면 눈물이 핑 돌 정도로 반갑습니다. 그들이 즐거워하는 것을 보면서 우리도 덩달아 즐겁죠. 우리의 문화와 뿌리를 일깨워주고 그들을 바라볼 때 가장 보람되고 뿌듯합니다.” 현재 가장 뒤에서 젊은 단원들을 지켜보는 마음은 어떨까? “이곳에는 젊은 친구들이 많이 있습니다.

  젊은이들은 많은 발전성을 가지고 있죠. 앞으로도 이 친구들이 계속 이어가 줄 것이라 믿어 걱정 없습니다. 그저 열심히 만 해서 잘한다는 소리를 계속 듣는 것이 최고겠지요” 시민들의 지속적인 응원과 관심을 바란다는 김용래 회장.

  지금 하는 대로만 열심히 해주길, 그래서 계속 인정받길 바라는 마음뿐이다.

 
 
┃ 엄성현 이수자

  버나돌리기와 소고, 중무동의 역할을 하고 있는 엄성현 이수자. 그는 어떤 계기로 농악을 시작하게 되었을까?

  “원래 음악을 좋아했는데 초등학교 4학 때 풍물반을 운영하는 담임선생님의 권유로 시작했어요. 그때부터 한것이 23년째 되는 것 같습니다.” 지금은 고인이 된 최은창 무형문화재 명인이 공연에서 무동 아이들을 뽑았다. 당시에는 무동 아이들을 구하기가 힘들었는데 엄성현 이수자의 아버지는 당시 무동의 안 좋은 이미지에도 불구하고 적극적으로 지원을 해주었다.

   “아버지께서 평택에 온 김덕수 사물놀이 공연을 보고 영감을 받으셨어요. ‘네가 나중에 이일을 전문적으로 할 때는 많이 활성화되어 있을 것’이라고 하셨죠.” 당시 어린 나이였지만 공연을 하면 공연비를 받을 수 있었다.

  게다가 학업도 빠질 수 있었다. 어쩌면 농악을 할 수 있게 만든 조금의 이유가 될 것도 같다. 무동으로 시작했지만 상모가 더 멋있어 보였다. 그래서 무동을 하면서 상모를 함께 배웠다. 보통은 17살 정도가 되어야 상모를 할 수 있지만 13살에 이례적으로 상모를 하게 되었다.

  그렇게 빨리 배우고 빨리 터득했던 것이 아마도 지속적으로 농악을 할 수 있었던 진짜 계기가 되었을 것이다.

  해외 공연도 자주 나가는 평택농악. 많은 일이 있었을 것 같다. “한 번은 캄보디아 공연을 갔는데 공연을 마친 후 그 많은 사람들 중 단 4~5명만 의 박수를 받고 무대에서 내려왔어요” 더운 날씨 속에서 땀을 뻘뻘 흘리며 진행한 공연. 힘은 힘대로 들고, 마음도 상했다.

  그러나 공연 관계자 왈, 정말 성공적인 공연이었단다. “관계자 말로는 거기서 공연을 한 이후 박수가 나온 적이 없었는데 유일하게 우리 공연에서 박수가 처음 나왔다는 거예요. 그리고 마지막 날에는 거의 모든 관객들에게 박수를 받아 조금 놀랍기는 했죠” 어떤 공연이든 관객들의 호응이 있어야 객석과 무대 모두 즐거운 공연이 될 수 있다. 원래 박수를 치는 문화가 아닌 캄보디아에서 박수가 나왔다는 것은 정말 성공적인 것이었다.

  그들의 버나공연과 무동공연을 본다면 저절로 박수가 안 나올 수 없다. 이것이 우리 전통 문화인 농악의 힘임을, 그리고 자부심도 느낀다. “저희는 아파도 공연이 끝난 뒤에 아파야 하죠. 예전에 아이가 다친 적이 있어서 더욱 조심하게 되죠. 또 막상 무대 위에서는 아픈 것을 잊는 것 같아요” 무동은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일단 몸이 가벼워야 하며, 힘이 있어야 하고, 경력이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무너질 수 있다. 그렇기에 중무동을 할 수 있는 사람은 그가 유일했다. 그렇게 8년을 공연해 왔다. 이렇게 힘이 드는데도 계속 하게 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가끔은 사람들이 접해 보지 못해서 이 재미를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요. 저는 우연하게 이 일을 하게 됐지만 천운이라고 생각해요.” 천운, 그에게 있어 농악은 그만큼 좋다. “가끔은 조금 더 안정적이고 평범한 직 업을 가졌으면 어땠을까 생각해 본 적은 있지만 이일이 좋기 때문에 그때마다 마음을 잡고 일에 더 집중해요. 물질적인 것이 삶에 전부는 아닌 것 같아요.” 초심을 잃는 순간, 거만해지는 순간 끝이다. 후배들에게도 지금 즐거운 마음으로 시작했던 것을 끝까지 이어나가라는 조언을 빼놓지 않는다.

  열심히 배우려고 했던 그 열정들이 다시금 일에 집중할 수 있는 원동력이 되기 때문이다.

  “그저 지금보다 조금만 더 관심을 가져 주시고 공연을 즐겨주셨으면 좋겠어요. 저희에게 더 다가오셔서 함께 어울리면서 저희 안에서 즐겁게 공연을 보셨으면 좋겠어요.” 오히려 외지에서 많이 알아준다는 평택 농악. 평택시민들의 더 많은 관심과 응원으로 더욱 신명 나는 공연을 선보이고 싶다.

  그렇게 관객의 박수 속에서 더욱 빛나는 예인을 꿈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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