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동 도산서원 
 

  퇴계의 숨결 잦아든 선비정신의 요람

  경상북도 안동을 생각할 때 결코 잊어서는 안 될 이름이 조선 성리학의 우뚝한 거목 퇴계 이황이다. 그 중에서도 하이라이트는 단연 그를 배향하는 도산서원이다.

  조선시대 서원의 전형 보여주는 빼어난 서원

  도산서원은 실제로 가보지 않은 사람에게도 썩 낯익은 곳이다. 한동안 우리가 자주 사용하는 지폐에 퇴계의 초상화와 함께 서원의 전경이 그려져 있었기 때문이다. 지폐의 그림은 도산서원의 전경을 매우 사실적으로 묘사한 것으로 실제의 모습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

  도산서원은 퇴계가 세상을 떠난지 4년 후인 1574년(선조 7년), 퇴계의 후학들과 고장 유림이 중심이 되어 퇴계가 생전에 제자들을 가르치던 ‘도산서당’ 터에 지은 서원이다. 또한 조선 성리학의 우뚝한 산맥의 정신을 기리는 서원답게 조선조 말, 대원군의 추상같은 서원철폐령에서도 끄떡없이살아남은 47개의 서원 가운데 하나이기도 하다.

  도산서원이 자리잡고 있는 도산면 토계리 일대는 낙동강 물줄기가 그림처럼 휘감아 흐르는 참으로 아름다운 시골 마을이다. 도산서원으로 가는 길에 가장 먼저 발견하게 되는 유적은 낙동강변에 솟아오른 ‘시사대’이다. 퇴계의 학문을 흠모해 마지않았던 정조대왕이 퇴계의 뜻을 기리고 지방 선비들의 사기를 북돋기 위해 과거시험을 치렀다고 한다.

 
 

수려한 풍광, 고아한 건물에 스민 퇴계의 숨결
  현재의 도산서원 영역에는 퇴계가 생전에 제자들을 가르쳤다는 도산서당도 포함되어 있다. 초등교육기관인 서당이 단순히 학문을 가르치는 교육기관이었다면 서원은 교육의 기능과 함께 선현에 대한 제사의 기능까지 함께 갖추고 있는 고등 사립교육기관이다. 조선시대 서원의 일반적인 배치 형태는 ‘전학후묘(前學後廟)’라 해서 학문에 관련된 시설을 앞에 두고 사당을 뒤에 둔 뒤 그 사이를 담장으로 막아 두 영역을 구분해 주는 것이 보통이다. 정문인 외삼문을 들어가면 좌우에 선비들의 공부방인 동재와 서재가 마주 보고 있고 그 뒤로 강의실에 해당되는 강당이 자리 잡고 있으며 다시 그 뒤로 사당의 영역이 이어지게 되어 있는 것이다.

  강당인 전교당, 사당인 상덕사, 동재와 서재 등과 같은 주요 건물 이외에도 장서를 보관하는 장판각을 비롯, 관리인의 거처, 그리고 도산서당에 딸린 건물 일곽 등이 합쳐져 여느 서원보다 웅장한 느낌을 주는 것이 큰 특징이다. 단풍이 곱게 물든 가을철 도산서원은 고매한 인격과 높은 학식으로 한국 성리학의 영원한 스승으로 남은 퇴계의 기품이 절로 느껴지는 아름다운 공간이다.

 
 
 
 
 
 
 
 
 
 
 
 

 고창읍성

세월의 이끼 내려앉은 조선의 읍성

  고창읍성은 오랜 풍상을 이겨내고 오늘날까지 남아있는 10여 곳의 읍성 중 하나로 그 견고하면서도 고색창연한 자태로 조선시대 읍성의 됨됨이를 잘 보여주고 있는 대표적인 성이다.

든든한 성벽, 조선 시대의 읍성의 전형

  고창읍성은 전라북도 고창군 고창읍 읍내리에 있는 방장산의 한켠을 움켜쥐고 1.7킬로미터 정도나 이어진다. 높이는 낮은 곳은 4미터, 높은 곳은 6미터 정도로 현재 남아있는 어떤 읍성보다도 높고 견고하다. 동쪽과 서쪽, 그리고 북쪽에 성문이 모두 셋이 있는데, 이중 정문으로 쓰이는 문은 북문인 공북루이다. 남쪽은 산등성이로 이어져 문이 없다.

  정문으로 쓰이는 공북루를 통과해 성 안으로 들어서면 우선 잘 단장된 정원과도 같은 성안의 풍경이 펼쳐진다. 그러나 여기에 현혹되지 말고, 일단 성벽 위로 올라서 성벽을 따라 한 바퀴 돌아보는 것이 답사의 옳은 순서이다. 매년 9월 9일에 열리는 모양성축제에서는 이렇게 성벽을 밟으며 걷는‘답성놀이’라는 행사도 펼쳐진다.

  높다란 성벽을 밟으며 걷다보면 옹성을 갖춘 세 개의 문과 6곳의 ‘치’를 만날 수 있다. 옹성이란 성문을 보호하기 위해 성문 앞에 둘러친 성벽을 말하고‘치’는 성곽의 일부가 바깥쪽으로 돌출된 것으로 전투 시 성벽의 상태를 감시하고 성벽을 기어오르거나 성벽 가까이에 있는 적을 옆에서 공격하기도 하는 시설이다.

 
 
 사계절 아름다운 마법의 성

  고창읍성 내 대표적인 행정시설로는 읍을 다스리는 관청인 관아와 원님의 숙소인 내아(內衙), 죄수를 가두는 감옥, 관립교육기관인 향교 등이 있다. 이들 시설을 중심으로 주변에 시장과 상점, 가옥들이 위치 한다. 읍성 안에는 주로 관청에 근무하는 아전들이나 상인들이 거주하고 일반 농민들은 성 밖의 농토와 가까운 곳에 거주했다.

  그러나 고창읍성에는 다른 흔적들은 남아있지 않고, 객사와 동헌, 내아, 감옥 등 핵심적인 행정시설의 건물들만 복원되어 이다. 각 건물 들에는 옛 상황을 재현한 마네킹과 설명을 위한 자동 녹음 시스템이 가동되어 관광객들의 이해를 돕고 있다.

  성안의 전체적인 구조는 북쪽이 낮고 남쪽과 동쪽이 산자락을 끼고 높은 언덕을 이루고 있어 성안으로 들어갈수록 우거진 숲길을 걷게 되어 있다. 답사도 답사지만, 아름답고 시원한 숲을 천천히 거니는 기분이
일품이다. 이 숲으로 인해 고창읍성의 풍경은 어느 계절에 찾아와도 항상 잊을 수 없는 아름다움을 느끼게 해 준다. 봄이면 봄꽃과 푸르른 신록의 조화, 여름이면 우거진 녹음, 가을이면 곱게 물든 단풍, 겨울이면 온
통 하얀 눈으로 덮인 고성의 자태가 색다른 분위기를 자아낸다.

 
 

 강진 다산초당

 위대한 학자 다산의 고독한 숨결

  탐진만을 굽어보고 있는 만덕산 자락을 거닐면 초당 툇마루에 옷깃을 단정히 여미고 앉아 그윽한 차향으로 그 깊은 고독을 삭이는 다산의 모습을 어디선가 만날 수 있을 것만 같다.

만덕산 중턱에 선 고독한 학자의 안식처

  초당이 자리 잡은 곳은 강진만의 전경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해발 408미터의 만덕산 중턱이다. 우거진 숲 사이로 난산길을 10여분 쯤 올라야 초당에 도착할 수 있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초당 본채의 오른쪽에 딸린 서암의 아담한 자태이다. 서암은 문자 그대로 본채의 서쪽에 있는 집으로 다산의 가까운 제자들이 거처하며 학문을 배우던 곳이다.

  그 왼쪽으로 ‘다산초당’이라는 현판이 붙은 본채 건물이 위치 한다. 이 건물에 붙은 ‘茶山草堂’이라고 쓰인 현판은 추사 김정희의 글씨를 집자해서 모각한 것이다.

  본채 옆으로는 다산이 직접 파서 조성했다는‘연지석가산’을 조촐하게 복원한 연못이 있고 연못에서 오른쪽으로 조금 떨어진 곳에 ‘서암’과 짝을 이루는 또 하나의 별채 건물인 ‘동암’이 있다. 다산은 주로 이 동암에 들어앉아 공부와 저술에 몰두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산 아래로 강진만의 바다 풍경이 시원하면서도 아련히 펼쳐진 이 언덕에서 다산은 흑산도로 유배된 작은 형 약전과 고향에 두고 온 가족들을 그리워했다고 한다.

 
 

  그윽한 차향 속에 서린 다산의 흔적
  그밖에 초당에는 다산의 체취와 숨결이 남아있는 숨은 흔적들이여럿 있다. 다산이 직접 새겼다는 ‘丁石’이라는 글자가 새겨진 ‘정석바위’, 다산이 직접 파서 만들었다는 샘인 ‘약천’, 차를 유난히 좋아했던 다산이 차를 끓일 때 부뚜막으로 사용했다는 초당 앞의 큰바위 다조, 다산이 직접 땅을 파고 물길은 내고 돌을 날라 조성했다는 ‘연지석가산’ 등이 바로 그것이다. 다산은 이 고요한 자신만의 공간에서 치열하게 공부와 저술에 몰 두 하는가 하면 약천에서 솟아나
는 맑은 물로 차를 달여 마시고 더러는 천일각 근처의 산 중턱에서 먼바다를 바라보며 두고 온 가족을 그리워하며 눈물지었을지도 모른다.

  다산은 이로부터 유배생활이 끝날 때까지 만 11년 동안 이곳에 머물려 그 유명한 <목민심서>와 <경세유표>등 우리 역사에 길이 남을 불후의 저작들을 완성했다. 이런 점에서 다산초당은 다산의 위대한 학문이 절정을 이루어 만개한 요람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낙엽이 뒹구는 쓸쓸한 어느 가을날, 정적이 감도는 초당 앞마당을 거닐어 보라. 그윽한 차향으로 깊은 고독을 삭이고 있는 다산의 모습을 어디선가 만날 수 있을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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