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라를 빼앗기고 일제의 잔혹한 식민 치하에서 36년간을 보내고 일제의 패망과 함께 우리는 광복을 맞았건만, 단일 독립 국가 건설의 기회를 놓치고 분단 상태로 70주년을 맞는다.

  1945년 8월 15일 일본이 태평양 전쟁에서 연합군에게 패전하며 일본군의 무장해제를 빌미로 북위 38도선을 경계로 한반도 북쪽에는 소련군이, 남쪽에는 미군이 진주하게 된 것이 결국 오늘의 분단의 단초가 될 줄이야.

  전쟁이 끝난 1945년 12월, 모스크바 3상회의(미·영·소의 3 국외상 회의)에서 일본의 식민 통치를 받던 한국의 독립국가 재건을 위해 일시적으로 민주주의 임시정부를 세우며, 이를 돕기 위해 미·소공동위원회를 설치 하고, 미·영·소·중 4개국의 관리하에 최고 5년간 신탁통치를 실시하기로 합의하였다.

  그러나 우리 내부의 좌익세력들은 소련의 지시로 신탁을 찬성하게 되고 우익세력에서는 반대함으로써 대립 상태에 들어갔다.

  결국 미·소공동위원회도 결렬되어 한국문제는 유엔으로 넘어가게 되었다. 유엔에서는 1947년 9월, 한국임시위원단을 구성하여 위원단 감시 하에 인구비례로 남북한 총선을 실시하여 통일정부를 세우기로 결정하였다.

  이에 북쪽 좌익진영에서 이를 거부함으로써 총선이 가능한 지역인 남한에서만 총선이 실시되고(1948.5.10) 이어 헌법이 공포 되어(1948.7.17) 드디어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 수립을 국내외에 선포하게 되었다.

  이어 1948년 12월 대한민국은 한반도의 유일한 합법정부임을 유엔의 승인을 받은 것이다. 우리가 지금 분단의 아픔을 안고 통일의 그날이 오기를 고대하면서도, 군사적 대치상태에서 적대관계로 살아가는 것도, 그 원인을 살펴본다면 멀리는 일제의 침략과 강제 합병이고, 다음은 일제 패망 이후 강대국들의 자국 이익의 논리였다.

  그리고 더 중요한 것은 해방 직후 그동안 해외나 국내에서 일제에 맞서 독립운동을 했던 독립 운동가들 의 주권 회복의 방법에 대한 의견 대립, 민족주의자와 공산주의자와의 이념과 노선 차이가 결국 민족 내부의 응집력의 약화를 초래한 점이 아닐 수가 없다.

  해방 당시 우리 민족 지도자들의 이념이나 노선 싸움이 없이 하나로 뭉쳤다면 통일국가를 세웠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지금도 우리는 남북의 적대 관계는 그렇다 치더라도 우리 내부 에서의 보수와 진보, 좌와 우, 여와 야의 사사건건 대립과 투쟁으로 남남 갈등이 심화되고 있는 양상이다.

  이제는 이런 모든 갈등과 대립을 불식하고 화해와 협력으로 하나가 되어 광복의 축제와 함께 하루속히 통일의 축제로 이어졌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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