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 폭력에 관한 기사가 신문에 연일 보도된다. 상급생이 하급생을, 같은 반 친구를, 때리고 따돌림 주고 갖가지 방법으로 괴롭힌다. 여학생이고 남학생이고 다를 게 없다. 게다가 한술 더 떠서 선생님에게도 대들고 욕하고 주먹질 발길질을 하고 머리채를 휘어잡기도 한다. 피해를 당한 학생은 타교로 전학을 가야하고 견디다 못한 피해 학생은 부모나 선생님한테 직접 호소도 못한 채 메모 정도 남기고 투신자살을 한다. 
그 동안 교육 당국이나 정부 차원에서도 이런 저런 대책을 내놓고 실전을 방불케 하는 처방을 하고는 있으나 폭력은 좀처럼 가셔지는 기색이 없다. 그 폭력의주체인 ‘일진회’라는 조직은 전국의 초·중·고로 망라되어 있으며 기성 조직 폭력배의 행태를 그대로 자행하고 있다.
이 폭력의 무대요 현장은 바로 학교 울타리 내에서 이루어지고 있다는데 더욱 놀라지 않을 수 없다. 그렇다면 ‘아이들을 직접 지도하고 보호해야 할 선생님들은 도대체 무엇을 하고 있는 것일까?’라고 학부모들이나 일반 시민들은 개탄하고 있을 것이다. 아마도 40대 이후 세대들은 더욱 그런 느낌이 들을 것이다. 지난 시대의 학생들은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사람이 있다면 학교 선생님이었다. 선생님이 눈을 부릅뜨기만 해도 숨을 죽여야 하고 하물며 매라도 들고 벌이라도 세운다면 그보다 더 두려운 게 없었다. 어쩌다 학교에 지각을 해도 수업 시간에 좀 딴청을 부려도 불호령이 내렸다. 친구들끼리 싸움을 하거나 극장에 갔다가 들키거나 몰래 숨어서 담배를 피우다 들켰거나 술을 마시다 들키는 날이면 영락없이 정학, 퇴학을 당했다.
그만큼 교칙이 엄했고 또 그 교칙의 권위가 세상의 형법과 같았을 정도였다. 그 시절에도 물론 불량학생도 있었고 폭력과 왕따가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발각되는 즉시 교칙에 의해 엄중한 처벌을 받게 되다보니 지금처럼 사회적으로 문제화 될 여지가 없었다. 그것은 선생님들의 권위와 교권이 존중되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요즘에 와서 학생의 인권을 내세워 교칙을 무력화시키고 선생님들의 권위와 교권을 노골적으로 무시하게 된 것도 사실이다. 어떠한 경우에도 학생의 체벌이 금지되고 따라서 정학이나 퇴학의 교칙 조항은 유명무실하게 되었다. 이런 현실이 되다 보니 학교 안에는 호랑이 선생님의 존재가 없어지고 나약한 토끼 선생님만이 남게 되고 오히려 학생이 호랑이가 되었다. 심지어는 자식이 학교에서 선생님한테 책망을 들었거나 회초리나 뺨 한 대 맞았다고 학부모가 학교에 쫓아와 학생들 보는 앞에서 선생님의 멱살을 잡거나 머리채를 휘어잡고 폭력과 욕설을 퍼붓는 세상이 되었다.
아이들의 개성을 키워주고 인권을 신장시켜야한다는 명분으로 아이들을 지도하고 교내 질서를 잡아가야할 선생님의 손발을 묶어 놓고 무조건 교육적인 최소한의 제재력 마저도 없애다 보니 오늘날의 이런 사태가 올 수 밖에 없잖은가.
지금이라도 다시 학교의 교칙의 기능을 부활시키고 교사들에게 권위와 지도력을 되찾아 주워야 한다. 한편 가정에서도 자녀들을 무조건 감싸기만 할 것이 아니라 옳고 그름에 대한 분명한 가르침과 벌도 따라야 한다. 일부 진보성향의 교육감들의 ‘학생인권조례’라는 것도 재검토 되어야 한다. 그 학생인권조례가 오히려 학생들의 그릇된 행위를 제재할 기능을 마비시키고 오히려 조장시키는 결과를 초래한 것이 되었다.
겉으로는 엄격하고 무서웠으면서도 뒤로는 한없이 인정이 넘치셨던 호랑이 선생님이 예나 지금이나 선생님의 표상이 되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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