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식이 맛있으면 소리를 내며 먹는다” 우리는 뜨겁고 김이 모락모락 나는 음식을 최고의 음식으로 여긴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밥과 된장국, 즉석에서 구워 먹는 삼겹살, 그리고 식탁에 앉으면 항상 듣는 말은 식기 전에 어서 먹으라는 말이다. 이렇게 뜨거운 음식을 먹으려니 입으로 우선 불고 입안에서 구르고, 입을 열어 찬 기운으로 음식을 식게 만들려고 소리를 만든다.

한 일본 식당에 갔는데, 한 어머니가 초등학교에 다닐법한 아 이를 세 명이나 데리고 왔다. 나는 그 가족을 등지고 앉았는데, 고개를 돌려 한번 쳐다보고 싶은 마음을 감출 수가 없었다. 그 이유는 음식을 먹는 소리가 유난히 요란했기 때문이다. 당장 걱정이 앞선다. 저 아이들이 자라서 외국 바이어들과 식사를 하는 자리에서 음식먹는 소리를 저렇게 요란하게 내면 우리 물건을 팔 수 있을 것 같지가 않아서이다.

식탁에 앉아서 식기 소리를 내지 않고, 음식을 입에 넣고 말 하지 말고, 음식을 씹거나 국물을 먹을 때 소리를 내지 말고 먹 어야 한다. 그렇지 않을 경우 또 한 가지 다른 방법이 있다. 만일 외국인과 식사를 할 때 우리의 음식 먹는 문화를 먼저 말하는 것이다. “우리는 음식이 맛있으면 이렇게 소리를 내며 먹는다. 그렇지 않으면 실례이다”

 “남에게 피해 주기”

우리 아이들은 할아버지 할머니와 자라서 아주 버릇이 없다. 두 분이 아이들에게 뭐든 다 들어주기 때문이다. 아이들에게 피자를 만들어 주고 싶어 피자 재료를 사다가 집에서 오븐에 요리 해 먹으려고 하는데 아이들이 달려온다. 자기들이 해보고 싶다는 것이다. 그래서 내버려 두었는데 대단히 재미있어 한다. 피자가 막 만들어져 나오려고 하는데, 할머니가 오셔서 나를 나무란다. “어디, 남자아이에게 부엌일을 시키느냐”고. 그 말을 듣자마자 아이들이 식탁에 앉아서 피자를 챙겨 주기를 기다린다. 요리도 직접하고 설거지를 하는 아이들을 원하는데 가정에서 그런 기회를 주지 않으니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어느 비 오는 날 전철을 타고 천안으로 가는데, 한 할머니가 우리 집 아이만한 손자를 데리고 타는데, 할머니가 손자를 위하는 마음이 극진하다. 먹여주고 입을 닦아주고 손자가 해달라는 데로 불편한 것이 없도록 다 뒷바라지한다. 그런데 손자가 진흙이 묻은 신발을 싣고 좌석에서 일어서고 앉고 하는 과정에서 옆 신사분의 바지에 진흙을 묻혀버렸다. 그 신사 분은 아주 매너가 좋은 분이었다. 자기 손수건으로 바지를 닦아내고 그 꼬마 아이를 쓰다듬어 주고 웃어주기까지 했다.

아 저거구나, 우리 사회는 저런 아이가 피해를 주는 것은 어리다고 생각하고 오히려 귀엽게 받아 들이는구나. 그렇지만 나는 하나의 원칙을 정하기로 했다. 우리 아이가 집에서 버릇없는 것은 어쩔 수 없어 감수하기로 하지만 밖에서 저렇게 남에게 피해를 주는 경우는 절대 없도록 해야겠다고.

 “어디 돼라지게 똑바로 쳐다보고”

커뮤니케이션을 잘하는 것은 중요하다. 커뮤니케이션을 통해 우리의 일상을 해나가기 때문이다. 상대의 눈을 보고 정확하게 이야기하는 것은 훈련에 의한 것이다. TV에서 방영되는 뉴스를 보면 방송 앵커들이 아닌 다른 사람들이 말하는 것을 보면 다들 시선을 떨어뜨리든지 피하고 말하는 것을 본다. 그렇게 시선을 아래나 딴 데 두고 말하면 어쩐지 정직하게 보이지 않는 것이다. 고위 공무원부터 TV에 출연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담당 PD가 교육을 시켜야 하는 것이 아닐까?

사람을 뽑으려고 인터뷰를 해보면 다들 내 눈을 쳐다보고 말하지 않는다. 그런 사람은 자신감이 없어 보이는 것은 당연하고 뭔가 숨기고 있는 듯한 느낌도 준다. 그래서 나는 우리 직원들에게 항상 자연스럽게 상대의 눈을 보고 말하라고 한다. 조금 웃으면 더욱 좋고. 나도 눈을 보고 이야기하는데 눈을 보고 이야기하면 좋은 점이 많다. 사람의 느낌을 잘 알 수 있고 내 느낌을 잘 전달할 수 있기 때문이다.

가치관은 변한다. 아마 어린 시절, 아니 그보다도 더 오랜 전부터 시선을 똑바로 쳐다보고 말하면 버릇없는 것으로 교육받았기 때문에 이런 습관이 지금도 남아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이제부터 사람들과 대화할 때 눈을 바라보면서 말하자. 정 자신이 없다면 코끝을 바라보는 것도 좋지 않은가.

 “차가 지나가니 거기 유모차 물렀어라”

도로는 국민이 돈(세금)을 내어 국가가 건설하고 차와 사람 이 통행할 수 있도록 관리하는 곳이다. 그러므로 그 도로 위를 자전거를 탄 사람이나 보행자들은 공평하게 통행하고 사용할 수가 있다. 그런데 지금 도로를 보면 차량 위주로 운행되고 있다. 웃기는 것은 건널목에서 일어나는 일들이다.

운전자들은 보행자를 굉장히 못마땅하게 여기는 것 같다. 건널목에 보행 자들을 위한 초록색 불이 들어왔는데도 운전자들은 슬금슬금 앞으로 나온다. 신호등이 없는 곳이면 건널목에서는 더 웃기는 일이 일어난 다. 어느 날 건널목을 건너려고 차량이 뜸해지길 기다리는데, 건너편에서 젊은 어머니가 유모차에 갓난 아기를 태우고, 다른 한 아이 손을 잡고 건널목을 막 건너고 있는 데, 차량이 5 미터나 더 되는 곳에서 신호음을 빵빵 울리며 마치 내가 지나 가는데 정지하라고 시위하는 것처럼 빠른 속도로 건널목을 스쳐 지나간다.

그 젊은 어머니는 길을 건너다가 서서 마치 큰 잘못이라도 한 것처럼 무안해한다. 이런 현상이 벌어지니 운 전자들은 유모차도 없이 아이와 함께 건너지 않는 보행자를 어떻게 보겠는가. 도보로 출근할 때 건널목에서 서서 차량이 좀 뜸해지기를 기다리는 일에 이제는 익숙하다. 그런데 택시 기사, 버스기사, 넥타이를 맨 신사나 어떤 숙녀도 하나같이 보행자를 배려하지 않는다. 딱 한번 차를 세워 주신 분이 있었는데 그것이 대단한 자비처럼 느껴져 기억에 남아 있을 정도다. 모든 운전자들은 보행자를 위해 건널목에서 정지해야 한다. 하나하나 따져보면 그들은 바로 우리 가족이고 아이들이다. 모든 운전자들이 보행자들을 존중해주지 않는다면, 운전자들의 가족들은 어떤 운전자가 보호해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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