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일상적으로 쓰는 말 중에 그 말의 뜻이 애매모호한데도 하는 사람이나 듣는 사람이 같은 뜻으로 바로 알아듣는 묘한 느낌을 주는 말들이 있다. 몇 가지 예를 들어 본다. 친구들이 만나서 “술이나 한 잔 하지” 라고 해서 어울려 술을 마시다 보면 한 잔만 마시는 게 아니다. 그래도 어느 누구 하나 한 잔만 하 자 해 놓고 왜 여러잔 마셨냐고 따지는 사람도 없다.

처음부터 표현은 한 잔이라 했지만 그것은 곧 이곧대로 한 잔이라는 뜻이 아니고 술 마시자는 포괄적인 뜻이 담긴 말이다. 그래서 여러 잔을 마시고 취하고 나서도 “나 술 한 잔 했지”라고 해도 한 잔을 그대로 믿는 사람도 없다. 또 이런 경우, 뜨끈한 국물을 한 숟가락 떠 마시고도, 냉수를 한 잔 마시고도 시원하다고 하고, 뜨거운 물에 목욕을 하고 나서도 시원하다고 한다.

보통 시원하다는 뜻은 더울때 바람이 피부에 스쳐 상쾌한 촉감을 느낄 때를 말하는데 시각적으로 드넓게 펼쳐져 막힘이 없어 보이거나 답답했던 내장 기관이 편안해질 때 등 무언가 불쾌감이나 답답한 느낌이 순간 사라져서 상쾌하고 만족할 때 두루 쓰인다. 이 역시 상황은 각기 다르지만 억지로 구분하지 않아도 ‘시원하다’ 한 마디로 다 통한다.

또 재미있는 말은, ‘거시기’가 있다. 거시기는 국어사전에는 ① 말 하는 중에 물건이나 일의 이름이 얼른 입에서 나오지 않을 때 그 이름 대신 쓰는 군 말, ②말하다 말이 막힐 때 나오는 소리라고 되어 있다. 상대편에서 말하는 도중에 하고자 하는 말이 얼른 안 튀어나와서 ‘저거시기, 있잖아’ 라고 해도 웬만하면 듣는 사람이 다 알아차린다. 어떤 때는 하고자 할 말을 알고 있으면서도 차마 바로 표현하기가 곤란한 말을 거시 기라고 한다. 그래도 다 알아듣는 게 거시기가 품고 있는 뜻이 무선 통신처럼 잘 전달되는 것이다.

요즘 젊은 여성들 사이에는 애인이나 신랑에게도 ‘오빠’라고 부른다. 오빠는 본래 오누이 간에 부르는 호칭이다. 그런데 애인에게도, 신랑에게도, 친 오빠에게도, 다 오빠로 통한다. 또 어디를 가나 나이가 좀 들어 보이는 분에게는 아버님, 어머님이라고 서슴 없이 부른다. 친 부모님이나 시부모님 외에 누구에게도 부를 수 없는 호칭이거늘, 요즘은 일반 명사 처럼 쓰고 있는 것이다.

수에 대한 표현도 뚜렷하지가 않다. 즉, 두어 서너 개, 너 더 댓 개, 예닐곱 개이다. 그렇다고 해서 부정확하다고 따지거나 되묻 지도 않는다. 다 그 수의 개념을 곰김하며 인지하기 때문이다. 반면, 시다 시큼하다 새콤하다, 쓰다 씁쓸하다 씁쓰레하다, 달다 달콤하다 달착지근하다 등으로 한 가지 뜻인데도 섬세하게 구분해서 여러 말로 표현하기도 한다.

이처럼 같은 말이지만 다양한 의미와 느낌으로 서로 간에 공감하며 아무 불편 없이 때로는 묘한 쾌감을 느껴가면서 사용한다. 어떻게 보면 불합리해 보이기도 하지만, 또 한면으로는 융통성과 포용성이 있는 넉넉한 이해력을 지닌 점도 없지 않다. 말은 주고받는 가운데 서로 교감하고 때로는 깊은 정도 새기고 때로는 대립하여 싸우기도 한다.

앞에 예로 들은 말들은 꼭 집어서 정확하게 표현하지는 않아도 다 알아 듣고 별다른 시비가 없다. 의정 단상에서 여·야간에 오가는 말들도 다 어디 한군데 애매 한 데 없이 정확하고 예리하다. 그런데도 서로 상대편 말의 뜻을 알아듣지 못하는 것인지, 알아 들으려 하지 않는 것인지, 늘 충돌하고 싸운다. ‘거시기’라고 하 던, ‘두어 서너 개’라고 하던 다 알아듣듯이 올해에는 서로 알아 듣고 싸우지 않았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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