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송문주 장군, 대몽항쟁으로도 유명

 - 오누이 설화 등 흥미 있는 이야기 넘쳐

안성시 죽산면 죽양대로 111-71 죽주산성. 이곳에는 대몽항쟁(고려가 몽골에 맞서 싸운 전쟁)의 정신이 깃들어 있다. 고려시대 무신인 송문주 장군이 몽고군의 침략에 맞서 싸운 끝에 몽고군을 몰아낸 역사가 있기 때문이다.

이날 필자는 죽주산성을 방문하기 위해 죽양대로를 이용했다.

죽양대로 왼편, 차창 너머로 보이는 죽주산성의 모습은 육안으로도 쉽게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 큰 규모로, 마치 사람 머리 위에 놓인 왕관처럼 산봉우리를 둘러싸고 있었다. 필자는 이날 안성시에 규모가 크고 역사적 가치를 지닌 산성이 하나 있다는 말을 듣고 직접 보기 위해 무작정 이곳을 방문했다.

죽주산성에 이르기까지의 길은 매우 가파르다.

산성에 들어가기 전, 입구 앞에 위치한 주차장은 그리 넓지 않았으나, 아침에 찾아간 죽주산성은 고요했고, 산성을 둘러싸고 있는 나무들과 땅에서 올라오는 진한 흙 내음이 이곳이 산성임을 다시 한번 확인시켜 주는 듯 했다.

■ 죽주산성에 얽힌‘오누이’전설

본격적으로 죽주산성을 탐방하기 전, 죽주산성의 축성과 관련한 흥미로운 전설 하나를 소개하고자 한다.

옛날에 과부가 된 홀어머니 밑에 비범함을 지닌 두 남매가 살고 있었다.

그들은 겨드랑이에 날개가 돋아 있어 주위 사람들에게 ‘장사남매’라고 불렸다. 

남동생이 열여섯 되던 해, 나라에 큰 전쟁이 나서 전쟁터로 나갔으나 패하고 도망쳐 왔다.

누나는 이를 용납할 수 없었고 동생에게 자결을 권했다. 

허나 동생은 후일을 위해 집으로 돌아온 자신의 행동에 억울함을 호소했고, 누나는 이것이 일리가 있다고 생각했지만, 그냥 용서해 줄 수는 없기에 내기를 해서 이기면 살고 지면 죽을 것이라는 약속을 했다. 

그 내기는 일주일 동안 누나는 죽산에 산성을 쌓고, 남동생은 나막신을 신고 송아지를 끌고 임금님이 계시는 도성까지 다녀오기였다. 

여섯째 되던 날 누나는 벌써 성을 다 쌓고 서남쪽으로 여섯 자 정도만을 남겨두고 있었다.

이를 지켜본 어머니는 대를 이을 아들을 살리기로 결심하고 뜨거운 팥죽을 쑤어 딸에게 먹여 시간을 지연시키고자 했다. 

무더운 여름에 누나가 뜨거운 팥죽을 먹으며 천천히 성을 쌓는 사이에 동생이 돌아왔고, 내기에 진 누나는 약속대로 자결했다. 

누나가 자결하자마자 몸에서 세 마리의 파랑새가 날아올랐고 후에 남동생은 훌륭한 장수가 돼 나라에 크게 공헌했다고 전한다. 

이 장수가 바로 고려시대 때 죽주산성에서 몽고군의 침략에 맞서 싸운 ‘송문주 장군’이다.

■ 죽주산성의 유래

 
 

죽주산성은 6세기 중반경 신라가 북진하는 과정에서 서울 지역과 대중국교역항이 있었던 당항진(남양만 일대)으로 진출하기 위한 거점으로 축조된 것으로 알려졌다.

내성, 본성, 외성의 중첩된 성벽 구조를 갖추고 있으며, 현재 원래의 성벽이 온전히 남아있는 것은 외성뿐이고 내성과 본성은 심하게 훼손된 상태다.

현재 우리가 걸으면서 느낄 수 있는 것은 성벽의 외성이며, 이 외성의 둘레는 1,688m로 삼국시대 성곽 중 대규모에 속한다.

문화재청의 설명에 따르면, 성벽은 기저부를 계단식으로 정지하고, 내벽과 외벽 및 속채움까지 모두 돌로 쌓았으며, 성돌은 장방형으로 가공해 바른층쌓기 방식으로 수직에 가깝게 쌓아 올렸고 외벽에는 보축성벽을 덧붙여 쌓았다고 한다.

문화재청 관계자는 “죽주산성은 여러 시기의 축성법을 간직하고 있는 우리나라 축성기술사의 보고라고 할 수 있다”며, “고려 고종 23년(1236)에 성벽을 수축한 것으로 보이고, 조선시대 임진왜란 후에도 수축이 이루어졌으며, 이때 왜성의 축성법이 일부 적용된 것으로 성벽의 외벽경사가 완만해지고, 특히 남치성은 모서리에 대석이 사용되는 등 왜성의 축성법을 모방한 것으로 보인다”고 전했다.

안성시 문화예술사업소 조비룡 주무관은 “2015년 국가문화정비계획에 따라 현재 죽주산성의 내성을 보수 중이며, 지속적인 보수와 유지를 위해 노력하고 있다”고 말했다.

■ 대몽항쟁의 정신이 살아 있는‘기념물’

죽주산성은 송문주 장군이 ‘대몽항쟁’한 곳으로 유명한데, 몽고군의 침입에 맞서 몽고군을 내쫓은 것이다,

당시 송문주 장군의 지혜를 엿볼 수 있는 이야기가 있다. 바로 ‘잉어 이야기’이다. 

송문주 장군은 1236년 (고종 23년) 몽고의 3차 침입 때 죽주산성으로 파견됐다. 몽고군이 죽주산성 근처에 이르고 산성을 점령하기 위해 성을 포위하며, 물이 떨어지기를 기다리는 전략을 취하자, 이에 송문주 장군이 잉어를 몽고군의 진영으로 보냈다. 

몽고군은 성안에 물이 충분하다고 여기고 포위를 풀게 된다. 그리고 송문주 장군은 퇴각하는 몽고군을 쫓아가 승리를 거둔 것이다.

현재 죽주산성에는 대몽항쟁의 기록이라 할 수 있는 예로부터 사용돼 온 포루가 존재한다. 

성벽을 따라 쭉 가다 보면 남문(南門)이 나타나고, 이 남문을 지나 계속 걸으면 성벽 북쪽에 포루가 있다.

죽주산성 북포루(竹州山城 北砲樓)는 성을 효과적으로 방어하기 위해 성벽을 외부로 돌출시켜 유리한 지세에 대포를 쏠 수 있게 설치한 누각으로, 현재 그 터와 포루의 초석 일부가 남아 육안으로 확인이 가능하다.

■“송문주 장군을 기린다”‘충의사(忠義祠)’

 
 

송문주장군 사당이 언제 처음 만들어졌는지 정확히 알 수는 없으나 정조 때 문신이자 수원화성 축성의 총책임자였던 채제공(蔡濟恭) 선생이 쓴 번암집의 송장군묘비명으로 추측컨대 송문주 장군 사후(1200년대 후반) 처음 만든 것으로 보인다. 

송장군묘비명에는 사당을 만든 지 5~600년이 지나서 대들보가 부러지고 계단이 무너져 있는 것을 1767년 축산부사 유언지가 옛적과 같이 고쳤다는 기록이 있다. 

1933년 8월 25일 동아일보에는 ‘후대사람들이 송장군의 충열을 사모해 사당을 세우고 수백마지기의 위토(제사와 관련된 일에 드는 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장만한 토지)까지 장만했으며, 30년까지만 해도 제향날이면 죽산의 군인들이 취타대를 앞세우고 성대히 지냈다’고 기록돼 있다.

사당 안에는 송문주 장군의 초상화가 걸려 있고, 사당 건물의 양 측면과 후면에는 총 8개 벽화가 그려져 있다. 벽화에는 송문주 장군이 몽고의 침입에 맞서 병사들과 함께 싸우는 모습이 묘사돼 있다. 

■ 글을 마무리하며

죽주산성은 성벽 그 자체만으로도 역사적 가치가 매우 높지만, 그 안을 좀 더 들여다보면, 그곳에는 몽고군과 치열하게 전투를 하며 조국을 수호한 송문주 장군과 그의 병사들 그리고 이 성안에 거주했던 백성들의 이야기가 함께 어우러져 있다.

이러한 이야기가 죽주산성을 성벽과 함께 더 매력적으로 만드는 게 아닐까 싶다.

현재 죽주산성은 6월까지 보수 공사가 진행 중이다. 아직 정비가 완벽하게 완료되지 않아 관광객들을 맞이하기에는 약간 미흡한 점이 있으나, 웅장한 성벽과 탁 트인 전망을 향해 우뚝 서 있는 포루 그리고 사당과 벽화에 숨겨져 있는 역사 이야기에 관심 있는 관람객이라면 죽주산성을 한 번쯤 방문해도 좋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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