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 전 필자가 부목사로 있을 때 지도했던 그 시절 청년에게서 연락이 왔다.

스승의 날이라 오랜만에 연락한다면서 잘 지내느냐고 안부를 물었다.

스승의 날이라고 기억하고 연락을 준 것이 고마웠다.

그리고 문득 나의 스승들, 나를 자신의 어깨 위로 올려 주었던 여러 스승들을 떠올렸다. 나는 시골에서 한글도 깨치지 못하고 초등학교에 입학했다.

시골학교로 갓 부임한 담임 선생님은 방과 후 당신의 하숙집으로 나를 불러 한글을 가르쳐 주셨다.

지금도 그분의 성함과 얼굴이 생각난다. 

중학교 3학년 때 우리 반 담임 선생님의 별명은 ‘살모사’였다. 해병대 출신 선생님으로 과학을 담당하셨는데, 마치 빨간 모자를 쓴 훈련조교의 느낌이 들었다.

학생들이 잘못하면 단체기합은 기본이고, 체벌도 상당했다.

그런데 그 선생님은 학년 전체 1등을 하는 반 친구에 대해서도 결코 봐주는 일이 없었다.

군대식 교육과 과도한 체벌은 분명 옳은 일이 아니었음에도, 공평하게 당하는 일이어서 억울한 감정은 들지 않았던 어쩌면 역설적인 기억이 있다. 

고2때 국어를 가르쳤던 여선생님은 분명 외모적으로는 그렇게 뛰어난 분이 아니었다.

그러나 남자 학교에는 드문 여선생님이었다는 사실 자체, 그리고 단지 주입식 교육이 아니라 문학적 감성을 자극해주었기에 내가 국어과목을 더 좋아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심지어 당시 고문(古文)의 문장 전체를 달달 외어버리기까지 할 정도로 말이다.

대학 시절 인생의 스승을 만났다.

전공 교수님 중 한 분은 강의시간에 자주 내가 믿은 기독교 신앙에 대해 비판하셨다. 어느 날인가는 한 시간 내내 교수님과 논쟁을 벌이기도 했다.

신앙적으로는 도저히 함께 만나는 지점이 없을 것 같았던 그 교수님은 역설적으로 나의 사고의 폭을 넓혀 주었고, 논리적 사고 방법과 생각의 체계를 갖추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해주셨다.

그리고 나와 가장 친밀하고 가까운 분이 되었다.

교수실에 들러 이야기를 나누다가, “내가 철학과 교수가 되지 않았다면 기독교 신자가 되었을지도 모른다”고 하시던 교수님의 말씀은 못내 여운으로 남았다. 

신학대학원에서 만난 한 교수님은 나에게 성경을 바로 보는 눈을 가르쳐 주셨다.

더욱이 어떻게 하나님을 믿고 섬겨야 하는지 모본을 보여 주셨다.

단순히 학문적인 신학연구가 아닌 고백적 신학의 삶을 사는 분이셨다.

스승의 날 감사하다고 찾아뵈었는데, 나에게 오히려 구두를 선물해 주셨다. 스승의 은혜는 끝이 없다. 

석사와 박사과정을 밟는 동안 나의 논문을 지도해 주셨던 교수님은 사비를 털어 많은 액수의 장학금을 주셨다. 넉넉지 않은 나의 경제 사정을 돕고, 또한 더욱 학문에 정진하라는 격려를 담아 매 학기 그렇게 챙겨주셨다. 감사한 마음을 전할 때마다, 스승이 제자를 챙기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것이라 부담 갖지 말라는 그분의 말씀에는 저절로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었다.

만유인력의 과학자 뉴튼이 했다는 유명한 말이 있다. “내가 더 멀리 볼 수 있었던 이유는 거인들의 어깨에 올라서 있었기 때문이다.” 수많은 거인들이 나를 그들의 어깨 위에 세워주었다. 작은 나를 인생의 선배들은 기꺼이 자신의 어깨 위에 나를 세워 주었기 때문에 나는 더 성장할 수 있었다. 

학교의 선생님들만이 아니다. 무엇보다 나의 부모가 당신들의 어깨위에 나를 세워주셨기에 나는 올바로 설 수 있었다. 나의 동료와 선배와 친구들에게도 많은 사랑의 빚이 있다.

내가 읽은 수많은 책들이 나의 지적 토양을 마련해 주었다. 책의 저자들이 오랜 시간 씨름하며 이루어왔던 업적을 나는 짧은 시간에 나의 것으로 삼을 수 있었다. 

이제 나도 내 어깨를 부지런히 빌려줄 것이다. 누군가 나를 딛고 더 성장할 수 있다면 기꺼이 내 어깨 위에 세우는 일을 할 것이다.

그것이 내가 빚을 갚는 또 하나의 방법일 것이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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