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해 전주 본가에 내려갔을 때 일이다. 80이 넘으신 아버지께서 필자의 어린 시절 이야기를 끄집어 내셨다. 

아마도 초등학교 2학년 무렵의 일이었던 것 같다. 그때 나는 학교 숙제도 거의 안 해가고 맨날 노는 일에 정신이 팔려 있었다. 

어느 날 잔뜩 화가 나신 아버지는 나에게 심한 매질을 하셨다. 매 맞고 난 다음 날 아파서 학교에 가지 못했다. 사실 그렇게 기억이 생생한 것도 아니다. 그런 일이 한번 쯤 있었던 것 같다는 아주 어렴풋한 생각의 조각이 있을 뿐이다. 

45년 가까운 세월이 지나고서 아버지가 그 이야기를 불쑥 꺼내신 것이다. 그리고 아버지는 두고 두고 그 일이 미안했었다고 나에게 사과를 하셨다. 정작 나는 거의 까맣게 잊어버렸던 일을 아버지는 마음에 계속 담아 두셨던 모양이다. 

지금은 자기 자식이라고 함부로 체벌했다가는 큰 일 나는 세상이지만, 그때에는 그리 드문 일도 아니었다. 그리고 아버지의 매질은 다시 반복되지 않았다. 아마도 한순간 화가 나서 매를 대신 다음에 스스로 많이 반성하고 후회하셨던 모양이다.

그런 일이 아니라도 버거운 인생의 짐을 짊어지고 사느라 허덕이다 보면 가장 사랑으로 보듬어야 할 가족들에게 알게 모르게 상처를 줄 때가 있다. 

따뜻한 가족 이야기를 담았던 드라마 “응답하라 1988”에는 공부 잘 하는 언니에 치여 차별대우 당하는 작은 딸이 나온다. 

설움이 복받친 딸을 아버지는 밖으로 불러내어 이렇게 말한다. “아빠, 엄마가 미안하다. 잘 몰라서 그래. 첫째 딸은 어떻게 가르치고, 둘째는 어떻게 키우고, 막둥이는 어떻게 사람 만드는지 몰라서... 아빠도, 이 아빠도 태어날 때부터 아빠가 아니잖아. 아빠도 아빠가 처음이야, 그러니까 우리 딸이 조금만 봐줘” 

필자는 인터넷으로 이 내용을 검색하다 댓글들을 보고 조금 놀랐다. “자녀들한테 억울함과 서운함을 전가시키는 핑계거리 같아서 싫다”는 반응이 많이 있었기 때문이다. 아마 이 땅에 상처받은 자녀들이 많나 보다. 

그러나 어찌하랴. 부모가 되는 공부를 많이 한다고 해서 부모 노릇을 잘하는 것도 아니다. 몰라서도 그렇지만 알면서도 제대로 못하는 것이 얼마나 많은가! 너무 모자라지도, 과하지도 않은 적당함을 잃어버릴 때가 많았다. 

우리는 언제나 초보인생이다. 10대와 20대를, 30대와 40대에도, 그리고 더 나이 들어서도 우리는 예행연습 없이 살아간다. 한 번도 미리 걸어가 보지 못한 인생길이었다. 그러니 실수투성이일 수밖에 없다.

어린 시절 우리를 양육하는 부모의 심정을 잘 알지 못했다. 부모가 되어보니 자식을 어떻게 길러야 할지 잘 몰랐다. 내 삶 자체가 늘 처음 걸어보는 길을 가야 했던 초보인생이었다.

자식 노릇도 잘 몰라서 제대로 못한 것 같고, 부모가 되어서 부모 노릇하기도 쉽지 않았다. 이제 위로는 부모님에게 자식으로, 아래로는 자식들에게 부모로 사는 지금, 그저 조금이라도 더 잘하고 싶은 마음뿐이다. 그리고 그러한 마음을 잊지 않고 살아가는 한, 실수도 하겠지만 서로 용납하고 모둠어가면서 사는 것이 가족이지 않을까? 

조금은 거칠고 투박했지만 힘든 시절을 너무나 애틋하고 따뜻한 부모의 사랑으로 잘 살아왔다. 그리고 그 사랑은 나를 통해 자식에게 흘러간다. 지혜의 왕 솔로몬은 자신의 아들에게 자신의 지혜와 훈계에 귀 기울이라 당부하며 이렇게 말한다. “(잠 4:3) 나도 내 아버지에게 아들이었으며 내 어머니 보기에 유약한 외아들이었노라” 완벽할 수 없지만 자식 잘되기를 바랐던 부모의 사랑의 수고와 노력이 나를 만들었고, 이제는 그 사랑이 자식으로 이어가는 것이다. 

오늘의 나는 서툰 초보인생을 살아왔던 우리 부모의 결과다. 그리고 내일의 자식 또한 초보인생을 살고 있는 나의 결과일 것이다. 

사랑이 있다면 조금 서투르다 한들 어떠한가? 서투름을, 초보인생임을 핑계 삼아 자신의 불성실을 정당화하지 않으면 괜찮지 않은가? 초보라도 괜찮다. 오늘도 부족하지만 서로 사랑으로 품어 가면서 살아가는 자녀들과 부모들을 응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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