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을 전공한 작가 강필이 쓴 <화가들의 인생 그림>을 읽었다(지식서재, 2022). 그 중에서도 필자의 시선을 끈 화가는 렘브란트였다. 이 책을 읽고 필자에게 렘브란트의 작품과 생애에 관해서 더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네덜란드 화가인 렘브란트(1606~1669)는 유럽 미술사에서 가장 위대한 화가로 손꼽힌다. 기독교계에서는 그가 많은 성경 속 등장인물을 그린 것으로 유명하다. 필자가 종종 찾아서 묵상해 보곤 하는 ‘돌아온 탕자’는 그중에서도 수작으로 평가받는다. 그림의 명암(明暗)과, 등장인물의 세밀한 묘사는 성경 말씀의 풍부한 의미를 눈앞에 재현한 것 같은 느낌을 준다. 

렘브란트는 초상화도 많이 그렸는데, 당시 상류층이나, 상업으로 거대한 부를 이룬 이들의 의뢰를 받아 개인 혹은 단체 초상화를 그렸다. 26세에 그린 <니콜라스 튈프 박사의 해부학 강의>는 각자의 개성을 뚜렷하게 표현하여 렘브란트의 인기와 명성을 치솟게 한 작품이다. 

반면 그가 36세에 그린 단체 초상화 <야경>은, 똑같은 돈을 내고도 어둠에 묻혀 알아보기 어렵게 그려진 사람들의 반발을 불러왔고, 상업적 인기로부터 멀어지는 한 계기가 되었다. 명성을 얻은 것도, 명성을 잃은 것도 모두 단체 초상화가 계기가 되었다는 것은 아이러니다. 

렘브란트는 자화상을 많이 그린 화가로도 유명하다. 20대 초반 때부터 1669년 63세의 나이로 죽기 직전까지 80여 점의 자화상을 그렸다. 다양한 미술 기법을 사용하여 그린 그의 자화상은 마치 일기를 써내려가듯 자신의 삶을 그려나갔다. 

패기와 야망이 넘치는 청년기, 거장의 자리에 오르고 사치와 향락을 누리던 전성기, 그리고 점점 몰락의 길을 걷게 되는 중년기와, 파산하고 사랑하는 가족들을 잃고 병약해진 노년의 모습까지를 사실적으로 그렸다. 그의 자화상은 그래서 그의 인생 일기, 혹은 자서전과 같다. 

그가 29세에 그린 자화상은 부유한 가문출신으로 렘브란트와 결혼한 사스키아와 함께한 그림이다. 부제(副題)를 ‘선술집 탕아’로 지은 것을 보면, 렘브란트는 이 그림으로 사치와 허영의 헛됨을 보여주려 한 것 같다. 반면 화가로서의 그가 누리던 인기와 부로 인한 사치, 그리고 부유한 여인과의 결혼으로 얻은 화려한 삶이 그림에 투영되었다. 한편으로는 부와 명예와 행복이 영원하지 않음을 인정하며 이렇게 살아도 되는 걸까 하는 한편의 고민과 함께, 그러나 현실적으로는 그런 사치에 흠뻑 젖어있음을 보여주는 것 같다. 

시간이 흘러 그가 죽던 해인 63세의 자화상은 전체 분위기가 어둡고 지치고 노쇠한 모습이다.

세월의 풍파에 찌들려 쇠락해가는 애잔함이 담겨있다. 젊은 시절 얻은 재물로 큰 저택과 수많은 골동품들을 사 모았지만, 인기의 몰락과 부인의 죽음은 그동안의 과도한 투자를 파산이라는 부메랑으로 돌아오게 했다. 

그의 말년의 자화상이 마냥 부정적인 것만은 아니다. <렘브란트>를 쓴 프랑스 작가 장 주네(Jean Genet)는 렘브란트의 생애에 대해 논평하기를, 그가 생의 마지막에 가까워지면서 선해졌다고 했다. 어찌 보면 자신감과 패기로 넘치는 청년기를 지나 수많은 성공과 실패를 거치고 노년에 이르는 과정은 욕심과 집착을 내려놓는 훈련의 기간이었는지 모른다. 

구약성경의 야곱은 자신의 생애가 ‘험악한 나그네의 세월’이었다고 회고했다(창 47:9). 자기 욕망에 집착하여 살면서 겪었던 수많은 우여곡절은 험악한 세월이었다. 동시에 그 나그네의 세월은 진정한 소망이 하나님께 있음을 자각한 시간이었다. 

위대한 전도자 사도 바울은 자신의 인생 말년에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딤후 4:7)라고 한다. 그의 말에는 ‘회한’(悔恨)이 아닌 ‘만족’(滿足)이 담겨있다. 

굳이 일기를 쓰지 않아도, 자화상을 그리지 않아도 우리의 삶은 우리의 얼굴에, 우리의 모습에 마치 나이테처럼 새겨진다. 지금까지 살아온 날들이 나의 자화상이 되고, 나의 역사가 되고 자서전이 된다. 우리의 마지막 자화상은 어떠한 모습일까? 과거에 대한 ‘회한’일까, 아니면 ‘만족’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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