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해 가을 교회 행사 때 여러 곳에서 축하 화분을 받았다. 몇 군데 나누어 주고서도 여러 개의 화분이 남았다. 

겨울이 되니 화분 관리가 어려웠다. 몇 개의 화분은 예배당에 두고 나머지 화분은 예배당 입구 현관에 전기 라디에이터를 켜두고 거기 모아 두었다. 

한 겨울이 지나는 동안 화분의 잎들이 노랗게 되어 떨어지기 시작했다. 결국 잎들은 다 떨어지고 거친 나무 둥치만 남았다. 

더 이상 살아있는 것 같지 않았다. 성도들의 의견도 같았다. 나무가 죽었다는 것이다. 

나무에게 미안했다. 관리를 잘하는 곳에 갔다면 멋진 잎들을 뽐내며 여전히 서있었을 텐데 말이다. 

봄이 되었다. 갑자기 따뜻해진 날씨에 혹시나 싶어 양지바른 곳에 화분을 내다 놓았다. 화분 주위를 방한 비닐로 감싸서 말이다. 

햇빛을 받고, 비를 받고, 따뜻한 바람을 받아도 변화가 없었다.

이제 이 화분들은 교회 마당 한편에 괜히 자리만 차지하는 존재가 되어 버렸다. 

저걸 어떻게 할까 생각하다가 이참에 잘라서 다른 폐목재들과 함께 버리기로 했다. 

나무 기둥을 잘라내고 화분에서 밑동을 조심스럽게 뽑아내었다. 아직 뿌리부분은 살아있는 듯이 보였다. 왠지 모를 실낱같은 희망이 생겼다. 

나무 밑동부분을 꺼내서 교회 앞 화단에 심었다. 식물에 대해 문외한이라 쓸데없는 수고를 한 것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것이 이 나무들에 대한 마지막 배려라고 생각했다. 혹시 마지막 남은 희미한 생명이 다시 소생할지도 모른다는 마음에서다. 

이럴 것이었다면 조금 더 일찍 화단에 옮겨 심었으면 살 가능성이 더 있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도 남는다. 

생명은 신비하다. 이미 다 죽어버린 것 같고, 아무 것도 없었을 것 같은 데 봄이 되니 여기저기서 화초들이 자라고 꽃을 피워댄다. 

차가운 콘크리트 바닥에서는 생각할 수 없는 흙의 신비다. 흙과 비와 따뜻한 바람을 품고 겨우내 잠들었던 생명들이 하나둘 깨어난 것이다. 

죽은 나무엔 봄이 없다고 한다. 영하의 차가운 칼바람이 사라지고 봄의 훈풍이 불어와도 죽은 나무에는 새싹이 돋지 않는다. 

그런데 과연 이 죽어버린 것 같은 화분의 나무들에게도 아직은 기회가 남아 있는 것일까? 시간이 좀 더 지나면 알게 될 것이다. 

구약성경 이사야서에는 매우 기름진 땅에 있는 포도원에 대한 이야기가 있다. 

이 이야기는 많은 기회를 주었음에도 끊임없이 죄를 지은 이스라엘 백성을 빗댄 이야기이다.

포도원 주인은 열심히 땅을 일구고 최상품의 포도나무를 심었다. 그런데 결과는 매우 실망스러웠다. “땅을 파서 돌을 제하고 극상품 포도나무를 심었도다 그 중에 망대를 세웠고 또 그 안에 술틀을 팠도다 좋은 포도 맺기를 바랐더니 들포도를 맺었도다”(사 5:2). 

포도원 주인은 이렇게 한탄한다. “내가 내 포도원을 위하여 행한 것 외에 무엇을 더할 것이 있으랴 내가 좋은 포도 맺기를 기다렸거늘 들포도를 맺음은 어찌 됨인고”(사 5:4).

기회를 주고 기다렸지만 그것에 걸맞은 결과를 얻지 못하였다. 결국 포도원 주인은 포도원에 대한 기대를 접고 그곳을 황무지로 만들어 버렸다. 더 이상의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다. 

우리 인생들에게는 과연 얼마의 기회가 남아 있을까? ‘일생삼회’(一生三會)란 말이 있다. 누구든지 인생에서 아주 중요한 기회를 서너 번쯤 만난다는 말이다. 

하지만 인생에서 열 번, 아니 백 번의 기회를 만난다 한들 그것을 잡지 못한다면 아무런 의미가 없다. 그래서 기회들을 놓치지 않기 위한 평소의 준비와 민감함이 필요하다. 

우리의 삶에 봄 같은 순간들이 있었고, 앞으로도 있을 것이다. 매 순간 사소한 일들이 모여 기회가 되기도 한다.

그것을 소중히 여기는 마음이 필요하다. 

죽은 나무에겐 봄이 없다. 그러나 우리에겐 여전히 기회가 남아있다. 그것이 살아있는 자들에게 주어진 희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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