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뿔싸! 이상고온으로 일찍 만발한 벚꽃 잎들은 이틀간의 비에 길바닥에 떨어져 어디론가 산산이 부서져 버렸다.

교회 성도들과 지지난 주말 잠시나마 벚꽃 구경하길 잘했다.

많은 비가 내린 것이야 농사철을 앞두고 내린 단비이니 반가운 것이고, 더구나 그렇게 잦았던 산불도 수그러들었으니 탓할 일도 아니다. 

하지만 지방자치단체들은 비상이라고 한다.

예년과 비슷하게 이맘때로 벚꽃축제 일정을 잡았는데, 이미 꽃은 지고 벚꽃 없는 벚꽃축제를 벌여야 하기 때문이다.

앙꼬 없는 찐빵이라 할까? 

그런 와중에도 어떤 지자체에서는 “중요한 것은 꺾였는데도 그냥 하는 축제”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지자체장까지  행사 홍보에 나선 것을 보았다.

작년 유행하던 “중꺾마”를 조금 비틀어 쓴 말일테다.

그런다고 벚꽃 없는 벚꽃축제가 흥이 날까 하는 생각도 해보지만, 뭐 봄나들이가 꼭 꽃만을 보자는 것이겠는가? 

부드럽게 살랑대는 봄바람이 못내 흥에 겨워 봄꽃도 보자던 것이고, 봄꽃이 좀 먼저 진다한들 그 흥조차 다 사그라지지는 않았을 테이니.

그리고 벚꽃만 꽃이겠는가! 튤립도 피어나고, 이곳저곳 흐드러지게 피기를 시작한 철쭉도 있다.

평택시농업생태원에서 꽃 나들이 행사를 한단다. 주말에 비 예보가 있기는 하지만, 거기도 어르신들 모시고 한 번 가볼 참이다.

봄은 지루하지 않다. 다채롭다. 색채가 그렇고 날씨도 그렇다. 한겨울의 기나긴 잿빛 세상에 비할 바가 못 된다. 

‘4월은 가장 잔인한 달’로 시작하는 유명한 엘리엇의 시 <황무지>는 왜 4월이 잔인한 달이 되었는지를 이렇게 표현한다. 

“죽은 땅에서 라일락을 키워내고 추억과 욕정을 뒤섞고 봄비로 잠든 뿌리를 뒤흔든다.

겨울은 오히려 따뜻했다. 대지를 망각의 눈으로 덮어주고 가냘픈 목숨을 마른 알뿌리로 먹여 살려 주었다.”

겨울이 좋았던 이유를 눈이 대지를 덮어 세상의 고통과 더러움을 잊게 해주고, 비축해 둔 식량으로 목숨을 연명할 수 있었기 때문이란다.

변화를 싫어하는 사람, 한없이 게을러지기를 원하는 사람, 그저 별일 없음과  무 활동을 위안 삼는 사람에게 봄이란 어찌 보면 고요한 잠을 깨우는 시끄러운 경적 소리와도 같을지 모른다. 

남구만의 시조 <동창(東窓)이 밝았느냐>를 보자. “동창이 밝았느냐 노고지리 우지진다. 소 치는 아이는 상기 아니 일었느냐. 재 너머 사래 긴 밭을 언제 갈려 하나니” 게으름과 늦잠을 탓하는 시구이다.  

봄은 부지런함을 재촉한다. 벌써 새벽 동트는 시간이 빨라졌다. 만물이 이렇게 기지개를 켜대니 우리 사람들도 게으름을 떨쳐내고 한번 힘찬 기지개를 펴도 좋을 것 같다. 

지난주일 부활주일을 보내면서 성도들이 동네 가가호호 방문해서 작은 선물을 전달했다. 역시 봄이라 그런가. 많은 집들이 외출중이라 닫혀있다. 

다 농사를 짓는 것도 아니니 밭일을 나갔는지. 아니면 봄나들이를 갔는지는 모를 일이다.

마을 주민 중 잘 받았다는 문자를 보내주어서 못내 반갑고 고마웠다. 

교회에선 봄맞이 대청소도 했고, 여기 저기 도색도 했다. 

손보려고 하면 끝이 없겠지만 그래도 하나 둘 조금씩 개선되는 것들에서 보람이 있다. 

도서관에선 신청했던 희망도서가 도착했으니 빌려가라는 연락이 왔다.

늘 연구하고 내면을 채우는 일에 게을리 할 수 없으니 이 봄에 다시 분발해야겠다. 

“심겨진 곳에서 꽃을 피우라”(Bloom where you are planted)라는 서양 격언처럼, 상황과 환경을 핑계 삼지 말고, 지금 있는 곳에서부터 무엇인가 변화를 이루어 가는 인생이었으면 좋겠다. 

벚꽃 엔딩? 그러나 그게 끝이 아니다. 봄은 계속된다. 계속되는 봄의 향연을 보면서 우리네 인생도 좀 아름답게 꽃피워갔으면 좋겠다.

우리는 과연 몇 막, 몇 장으로 구성된 인생을 살게 될까? 잘 모른다.

다만 이 새봄과 함께 당신의 새로운 장이 시작되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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