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자가는 공의와 사랑이 만나는 곳이다. 일반 대중들에게 ‘십자가’하면 도시의 밤 야경을 헤치는 빨간 네온 십자가를 떠올릴지 모른다. 거부감을 주는 부정적인 이미지로 말이다. 그러나 기독교인들에게 십자가는 각별한 의미가 있다. 기독교 구원의 핵심적인 상징이다. 

원래 십자가는 저주받은 죽음을 의미했다. 십자가 처형은 예수님 당시 가장 극악한 죄인을 죽이기 위한 형 집행의 방법이었다. 십자가 사형제도는 너무나 잔인한 것이어서 지배 민족이던 로마인들에게는 적용하지 않았다. 로마의 지배 아래 있었던 이방 민족들 중에 일어난 끔찍한 죄질의 범죄를 사형으로 다스리는 한 방법이었다.

재판에서 죄수의 십자가 사형이 확정되면 먼저 그 죄수를 채찍질했다. 고고학자들의 연구에 의하면 여기에 사용되던 채찍은 아홉 가닥의 가죽으로 된 채찍이었다고 한다. 각각의 가닥 끝에는 날카로운 쇠붙이나 짐승의 뼈를 깎아 만든 뾰족한 물체들을 달아서 몸에 채찍이 감길 때 살점이 찢겨나가도록 고안되었다. 그래서 십자가를 지기도 전에 이 채찍을 맞다가 숨을 거두는 죄수들도 있었다고 한다.

채찍질을 당한 죄수는 자신이 매달려 처형 받게 될 십자가의 가로대를 사형 집행 장소까지 스스로 짊어지고 가야했다. 십자가는 대개 120~150kg의 무게에 달했고, 십자가의 두 막대 중 하나인 세로 막대는 미리 땅에 박아 세우고 가로 막대를 죄수에게 매어 운반하게 하였다. 

사형장에 도착하면 죄수가 매고 온 십자가 가로대에 죄인을 눕히고 죄수의 손을 그 가로대에 못을 박아 고정시켰다. 그 가로 기둥을 도르래 같은 것을 이용해서 끌어올려 세로 기둥에 끼워 맞추는 방식으로 십자가형을 집행했다. 

처음에는 죄수의 손바닥에 못을 박았는데 자꾸 손이 찢어지면서 시체가 떨어지는 폐단이 있어서 나중에는 손목 가까운 곳에 박았다고 한다. 십자가 형벌의 잔인함은 매달린 죄수가 쉽게 죽지 않는다는 데 있었다. 인간이 고통을 느낄 기력이 남아 있는 한 모든 고통을 다 받게 하는 사형 제도였다. 

발에서 서서히 피가 빠져 나가고 뜨거운 팔레스타인의 땡볕 아래서 고열과 함께 땀을 흘린다. 몸에서는 피와 수분이 같이 빠져 나간다. 이와 함께 머리가 터지는 것 같은 두통을 동반한다. 

온몸의 체중을 지탱하고 있는 손과 발의 못 박힌 상처의 고통도 극심하지만, 출혈로 인한 체내의 통증은 가히 살인적인 것이라 한다. 죄수들은 십자가에서 기절했다가 깨어나고, 깨어났다가는 또 기절하면서 서서히 죽음을 맞이하였다.

그런데 왜 예수 그리스도는 그런 비참하고 저주스러운 형벌의 십자가를 짊어지고, 또 거기에 못 박혀 죽어야 하는 것일까? 그것은 죄인을 구원해 주시기 위함이다. 죄 없으신 분이 죄인들을 대신해서 그 형벌을 당하기 위해서였다.

모든 사람은 죄인이요, 그 죄의 값은 사망이라는 것이 성경의 선언이다. 하나님은 공의로우신 분으로서 죄를 절대 용납할 수 없으시다. 엄중한 심판을 요구한다. 그런데 하나님은 죄인인 인간이 망하는 것을 원치 않는 분이시다. 공의는 죄에 대한 엄중한 형벌을 요구하고, 사랑은 그 형벌을 용서하기를 원한다. 십자가는 이 공의와 사랑이 만나는 것이다.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즉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왜 나를 버리십니까?”라고 십자가의 예수 그리스도는 절규하였다(마 27:46). 그만큼 십자가는 죄에 대한 형벌을 무섭게 물으시는 공의의 현장이었다. 동시에 십자가는 인간이 죄로 망하게 하지 않게 독생자까지 아끼지 않으신 하나님의 사랑이 가장 극명하게 나타난 사랑의 현장이었다. 

이번 주간은 온 교회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고난의 의미를 묵상하는 고난주간이다. 그리고 오는 주일은 그 십자가의 고난과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승리를 기뻐하는 부활주일이다. 어쩌면 성탄절보다 더 뜻깊고 기뻐해야 할 날이다. 고난 후에 영광이다. 추운 겨울 끝에 새봄이듯, 십자가의 죽음으로 완성된 구원은 부활의 소망으로 꽃을 피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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