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그랑데는 <위대한, 대단하고 훌륭한>이란 스페인어이다.

‘마이 네임 이즈, 봄’이 왔다.

봄이 오니 이렇게 좋은데, 궈궈 울던 산비둘기와 까치, 직박구리, 길고양이와 강아지인들 오죽 좋으랴.

겨울 문턱을 지나는 일, 유별나고 지난(至難)한 한해였다.

계절통이 관절통 같이 깊었다.

시린 하늘을 올려다보니 어느새 버드나무 꼭대기 까치집이 분주하다.

꽃눈에 물이 차오른 가지마다 드나드는 날것의 생기 다 모였다. 

죽은 듯 살다 귀히 태어난 생명구역이니 어찌 위대하지 않겠는가.

세상을 구분 짓는 잣대 형태와 부류는 다양하지만 삶은 모순되게도 비도덕적 수단으로 사는 자들과 배고픈 자가 택하는 양자이론으로 극명히 구분되어진다. 

부자는 물질에 더욱 기만해지고 탐욕의 물오름은 봄보다 윤택하다.

자연보다 나은 질서가 없다고 했는데 가난과 부자<빈익빈부익부貧益貧富益富>, 현상을 만든 인간의 이론은 과연 정석일까. 

‘없는 자들은 버릴게 없어 가벼워서 좋다’는 말의 뜻을 곱게 핀 홍매와 청매가 피고 지는 모습을 보며 깨닫는다.

나는 참새도 아니고 여우도 아닌 오롯한 ‘나’다. 어쩌면 자아(自我)가 실하게 약은 사람이다.

먹을 쌀을 두둑하니 두고도 머리에 시를 쓸 언어, 마음에는 감정의 보트를 싣고, 타인을 위해 조금의 잔고도 두었다.

잔고를 꺼내어 써도 참 거룩하고 따스한 곳간이 외롭지 않은 유일한 행복이다.

세상에는 남을 위해 울어주는 눈물이 많다. 그것의 힘은 위대하고 의롭지만 헤쳐 나가는 물길도 만만하지 않다.

시대를 아울러 우리에게 귀감이 되는 명언과 명연설, 사상과 철학의 지혜가 넘쳐난다.

다이나믹, 스펙터클이 이와 같은 위용이다.

작은 ‘나’가 살아가는 동안 ‘나와 우리’를 동일시해야 한다.

그것과 동떨어지거나 멀어지는 사고관은 환멸과 고립의 세계를 만들어간다.

‘나만 행복하면’이란 객관적이고 독립된 이기가 ‘죽음의 지하 모녀’란 싸늘한 라인을 만든다. 

버드나무 긴 가지가 통통하다. 이제 이 싱그러움, 계절의 저력이 될 것이다.

살아가는 동안 나의 봄날을 비추어 낮은 지상으로 다가가자. 

모두가 따스하게 어깨를 펴고 동그란 웃음이 되는, 먹이를 먹는 모든 날개와 걸음이 자유롭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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