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가 고등학교 1학년 여름방학 때의 일이다. 당시 청과상회를 운영하시던 아버지에게 부탁해서 대전 청과도매시장에 물건을 떼러 가는 길에 동행하게 되었다.

일하시는 운전 기사분하고 둘이 트럭을 타고 대전 청과도매시장에 갔다. 

수백만 원 되는 물건을 가득 싣고 저녁 7시 정도가 되어 전주로 향했다.

대로변을 달리던 중 운전사 아저씨가 전방 주시를 게을리 하다가 사고가 났다. 빨간불에 정지해 있던 8톤 트럭을 그대로 들이받은 것이다.

기사 아저씨가 출출한 나머지 앞을 제대로 안보고 빵 봉지를 뜯다가 벌어진 일이다. 

앞차가 멈춘 것을 보고 필자가 소리를 질렀다.

급하게 브레이크를 밟았지만 너무 늦었다. 트럭 앞에 사람이 타는 부분이 완전히 찌그러졌다. 근처에 있던 경찰관들과 대로변에 있던 사람들이 힘을 합쳐 문짝을 뜯어내고 필자와 운전자를 끄집어냈다. 

운전기사 아저씨는 급하게 브레이크를 밟다가 복숭아뼈가 완전히 으스러졌는데, 필자는 어찌된 일인지 큰 상처를 입지 않았다. 응급실에서 주사를 맞고 하루 동안 병원에 입원해 있었다. 

사고가 났다는 전화를 받은 아버지는 다음날 고속버스 첫 차를 타고 대전에 오신다고 했다. 걱정이 되었다.

산지 얼마 되지 않은 차는 완전히 폐차가 되었고, 가득 실었던 과일들도 다 못쓰게 되었다. 더 심각한 문제는 차가 저렇게 망가지고, 운전기사도 큰 부상을 입었으니, 이제 몇 개월 동안은 장사도 접어야 할 판이었다. 너무 큰 피해였다. 

혹시 아버지가 나에게, “너는 운전기사 옆에 앉아서 도대체 뭐했냐고, 앞을 잘 봐야지 이게 뭐냐”고 하시면 뭐라고 하지? 잘 모르지만 필자가 봐도 보통 일이 아니었던 것이다. 

아버지가 병원에 오셨다.

평소에 무뚝뚝하고 별 말이 없던 아버지 눈치를 봤다.

그런데 아버지가 나에게 물으신 것은 한 마디였다.

“어디 다친 데는 없냐?” 다른 아무 말도 하지 않으셨다.

상황이 어떻게 되었었냐고도 내게  묻지 않으셨다.

어디 다친 데는 없냐며 내 몸 여기저기를 살펴보셨던 아버지를 잊을 수 없다.

아버지와 함께 고속버스를 타고 전주로 돌아가게 되었다.

고속버스에 올라 안쪽에 들어가 앉자마자 아버지는 내 좌석의 안전벨트를 매주셨다. 40년 가까운 과거의 일이다.

지금과는 달리 당시 고속버스에서 안전벨트를 매는 승객은 거의 없었다.

그냥 형식적으로 좌석마다 달려 있을 뿐인 셈이었다.

그런데 아버지는 그 안전벨트를 찾아서 굳이 매주신 것이다.

한 번도 나를 사랑한다고 하신 일이 없으신 아버지, 친근하게 따뜻한 말 한마디 건넨 적이 없었던 아버지, 자식 눈에 보기에 늘 실패만 하고 뭐하나 변변하게 자식을 위해 해주신 게 없다고 생각했던 아버지였다.

내 마음 깊숙이 서운함이 묻어 있었다. 

그런데 아버지가 아무 말 없이 나의 안전벨트를 손수 매주셨을 때, 그 순간 나는 그 속에서 많은 말들을 찾아냈다.

다시는 사고 나지 말라고, 죽지 말라고, 안전하라고.... 왠지 모르게 가슴이 따뜻해졌다. 저 깊은 곳에 응어리가 한껏 풀리는 느낌이었다. 

사고가 났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아버지의 마음은 어떠셨을까? 그 날 밤을 어떻게 지새우셨을까? 새벽녘이 되자마자 첫 차를 타고 올라오실 때는 무슨 마음이셨을까? 제발 내 자식 아무 일 없기만을 빌고 또 빌었을 아버지가 생각났다. 

필자가 군 입대할 때 아버지께서 입소대대까지 동행하셨다. 휴가를 나와서 어머니께 들은 말이 있다. 입대할 때 보니 그 동안 잘 먹이지도 못해서 그런지 내 자식이 너무 왜소하게 보였다고 아버지가 눈물을 글썽이며 마음 아파 하셨다는 것이다. 

 그런 아버지가 이제 팔순의 나이가 되셨다. 고1때 나에게 매주셨던 안전벨트를 종종 떠올린다. 필자는 본가에 가서 아버지를 만나 뵙고 돌아올 때마다 아버지를 안아드린다.

그리고 말한다. “아버지, 사랑합니다!”

저작권자 © 평안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