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나라 시기에 진(陳)나라에 완이라는 공자가 있었는데 전란을 피해 제나라에 와서 몸을 숨기고 있었다. 이때 제나라의 환공이 그를 좋게 보고 직책을 내렸는데 이후 그는 성을 전(田)씨로 개명하였다. 

그의 후손 중에 첩의 자식으로 사마양저가 태어났다. 원래의 이름은 전양저인데 그가 사마라는 관직에 임명되었기 때문에 후세 사람들은 그를 불러 사마양저라고 하였다. 그가 활동했던 기원전 6세기말에서 5세기 초에 제나라가 어려움에 처했다. 진(晉)나라가 공격해오고 또 북쪽의 연(燕)나라가 황하 유역까지 군대를 보내 제나라를 위협하고 있었다. 

제나라의 경공은 당시 재상이던 안영을 불러 대책을 논의했다. 그러자 안영은 바로 전양저를 추천하면서 “비록 그가 첩의 자식이지만 그의 인품과 학식에 많은 사람들이 감탄하고 무예 또한 적의 간담을 서늘하게 하니 그를 등용하기 바랍니다” 라고 말했다. 당시 시대에서 첩실은 사회적으로 편견의 대상이었으나 안영은 출신성분이 아니라 능력을 보고 추천한 것이다. 

경공은 기뻐하면서 전양저를 장군에 임명하고 진나라와 연나라가 차지한 제나라의 영토를 수복하라고 명령하였다. 양저는 자신의 신분이 미천한 출신이니 사람들이 자신의 말을 잘 듣지 않을 것이 분명하므로 군대를 감독할 인물을 보내달라고 하였다.    

그 말을 들은 경공은 자기가 총애하던 장가(莊賈)라는 신하를 파견하였다. 양저와 장가는 이튿날 12시에 군영의 정문에서 만나기로 약속을 하였다. 장가는 상당히 교만한 사람이었고 전쟁터에 나가기 전이라고 친척들과 술을 마시면서 약속 시간에 늦게 도착했다. 

장가를 기다리던 양저는 해시계를 엎고 물시계를 쏟아버리고 부대로 돌아가 열병식을 하고 군대를 지휘하고 군령을 선포했다. 해가 질 무렵에야 장가는 거만한 표정으로 부대에 도착했다. 양저가 왜 늦었는가 따져 묻자 친인척과 대신들이 자신을 위해 송별식을 해줘서 늦었다고 대답했다. 

이에 양저는 “전쟁터에 나간 장수는 명령을 받으면 그 즉시 부대로 가야하고 군령이 정해지면 이를 따라야 한다. 지금은 적군이 영토를 침략하여 시급한 때이며 병사들이 전쟁준비에 여념이 없다. 그리고 왕은 걱정이 가득하고 백성의 목숨이 경각을 다투는데 어떻게 송별회를 하는가?”라고 호통을 쳤다. 그리고 군대의 규율 담당에게 약속 시간을 지키지 않으면 어떤 벌을 내리는가 물었고 담당관은 참수형이라고 대답했다. 

이에 놀란 장가는 급하게 왕에게 사람을 보냈다. 경공은 이 소식을 들은 후 사람을 보내 장가를 놓아주라고 명령했다. 그가 말을 달려 부대에 도착했을 때 이미 양저가 장가를 참수한 이후였다. 

그리고 양저는 “장수가 부대를 지휘할 때 어떤 경우에는 군주의 명을 받아들이지 않을 수도 있다” 라고 말했다. 그리고 부대 내로 말을 달려오는 것 역시 목을 베어야 한다는 군법이 있었다. 양저는 왕의 사자를 죽일 수는 없다고 하면서 마부와 말의 목을 베었다. 이후 양저는 군대를 이끌고 전쟁터로 향했다. 

양저는 전쟁터에서 사병들과 같이 먹고 마시고 생활하면서 모범이 되었고 자신의 월급을 사병에게 나누어 주었다. 양저의 군대는 전쟁터에서 용감하게 싸웠고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이에 놀란 진나라와 연나라 군사들은 모두 도망가기 급급했고 빼앗겼던 영토를 모두 회복하였다. 그가 돌아오자 경공과 대신들은 모두 도성 밖으로 나와 그와 군대를 맞이하였다. 이후 경공은 그에게 사마라는 직책을 주었고 그의 병법은 ‘사마법’으로 후세에 전해지게 되었다. 사마양저는 출신과 능력은 별개라는 것을 보여주었고, 장수가 전쟁터에서 왕의 명령을 따르지 않을 수 있다는 말은 훗날 많은 사람들이 인용하는 문장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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