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17년에 정부로부터‘은관 문화훈장’수상

 - 前국가중요무형문화재 제52호 시나위 예능보유자
 
평택시 현덕면 평택호길 147 지영희국악관. 이곳에는 평택출신으로 국악관현악단을 창시하고 해금산조와 시나위의 명인으로 널리 알려진 지영희 선생의 국악예술의 혼이 살아있다.
필자는 평택출신 지영희는 누구이고, 지영희국악관은 어떤 곳인지 독자들이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지영희국악관’을 방문해 지영희 선생이 이룩한 업적과 지영희국악관에 대해 알아봤다.
 
 
 
● 지영희는 누구인가?

지영희 명인은 1909년, 평택군 포승면 내기리에서 태어났으며, 본명은 지천만(池千萬)이다.

어릴 적부터 호적·양금·해금·피리·대금풍류·대금산조·농악·무용 장고·소리·거문고산조 등을 여러 명인들에게 직접 배웠으며, 해금산조, 피리산조 연주자로 이름을 떨쳤다.

지영희 명인의 가문은 포승읍 일대에서 무업(巫業)으로 생계를 이어가던 세습무(世襲巫) 전통의 가문이었다고 한다.

이에 어린 시절의 지영희 선생은 한문과 근대교육과 함께 가문 대대로 이어져 내려오는 무속음악을 자연스레 익히게 됐으며, 만호리로 이주한 이후에는 경기도도당굿의 명인들로부터 다양한 기예(‘기술’과 ‘예술’을 아울러 이르는 말)를 배웠다.

11살부터 승무·검무·굿거리를 배웠으며, 22세에는 호적을, 23세에는 양금, 24세는 해금과 피리를 익혔다. 나아가 농악·민간풍류대금·무용장고·경기서도민요 등을 사사받는 등 다양한 기예를 손에 익혔다.

이렇게 배운 것들은 지영희 명인이 민속과 무속을 아우르는 국악에 대한 폭넓은 이해를 갖게 하는데 큰 시너지로 작용했으며, 창작분야에서의 출중한 능력도 여기서 빛을 발했다. 어릴 적부터 국악과 다양한 기예를 배우고자 했던 열정과 피나는 노력으로, 해금과 피리를 비롯해서 못 다루는 악기가 없을 정도의 경지에까지 올랐던 것으로 알려졌다.

이후 지영희 명인은 1972년 성금연·김소희·김윤덕과 함께 미국 카네기홀에서 대한민국을 대표해 협연을 진행했으며, 다방면의 활동과 업적을 인정받아 1973년, 국가무형문화재 제52호 시나위 예능보유자로 지정됐으나, 1974년 하와이로 이민하는 바람에 무형문화재 지정이 취소돼 비운의 국악인이 됐다.

그러나 지영희 명인은 구전(口傳, 말로 전하여 내려옴)으로만 전해 오던 우리 민요를 최초로 오선보에 체계적으로 정리해 기록하고, 각 악기마다 교본을 제작해 누구나 쉽게 배울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하는 등의 굵직한 업적을 남겼다.

비록, 하와이 이민으로 인해 국가무형문화재 지정은 취소됐지만, 지난 2017년 정부는 우리의 문화예술을 발전시키고 국가발전에 큰 기여를 한 사람에게 수여하는 ‘은관 문화훈장’을 수여했다.

이는 정부에서 수많은 업적을 남기고도 제대로 된 조명을 받지 못 했던 평택출신 비운의 국악영웅인 지영희 명인이 타계한지 반세기만에 그의 업적을 인정한 것이다.

 

● 국악의 대중화와 현대화 이룩

국악의 대중화는 지영희 명인의 위대한 업적 중 가장 큰 하나로 꼽힌다.

지영희 명인은 구전으로만 전해오고 악보도 없던 우리 민요 가락을 오선보에 체계적으로 기록하고 악기 종류마다 그에 맞는 교본을 제작했으며, 그 누구라도 쉽게 배울 수 있도록 했다.

조선음악연구소, 경성방송국, KBS방송국 등에서 관악담당악사로 활동하면서 여러 명인들과 함께 백여 장이 넘는 음반을 냈으며, 사도세자·장희빈 등 고전영화음악을 작곡하면서 국악이 온 국민에게 널리 퍼질 수 있는 초석을 마련했다.

아울러, 지영희는 국악의 현대화에도 큰 뜻을 품고 목표를 이루기 위해 진취적으로 나아갔다. 

최초로 우리 고유의 악기에 화성을 입히고 손수 국악의 박자를 변형해 새로 편성하는 등 지휘자로 참여해 현대화된 국악공연을 이끌었으며, 대한민국 최초의 국악관현악단(현 서울시립국악관현악단)을 창단하고 지휘자를 역임했다.

 
 












 

● 하와이로의 이민과 후학양성

지영희 선생은 1975년 하와이로 이민을 간다. 이에 따라 국가중요무형문화재 제52호 시나위 예능보유자 지정이 해제됐다. 

이민을 떠나게 된 이유는 국악협회 제명이 큰 몫을 한 것으로 알려졌다. 실제로 당시 신문 일면에 “중요무형문화재 제52호 시나위 보유자 지영희 국악협회 제명”이라는 기사가 실렸는데, 지영희 선생 본인조차도 제명 소식을 해당 기사로 접하게 돼 큰 충격을 받았다는 것이다.

이미 쇠약해 질대로 쇠약해져 그 길로 가족이 있는 하와이로 떠난 것이, 지영희 선생의 이민의 이유이기도 하다.

하와이로 간 지영희 선생은 시간이 지나고 하와이 현지에 한국민속예술원을 설립한다. 그리고 교민과 서양인들에게 국악교육을 시키고 하와이 대학으로 출강을 나가는 등 국악 교육과 함께 국악 공연을 여는 등 머나먼 타국에서도 우리 민속음악을 알렸다.

그리고 1980년, “경기도의 민속음악이 있는데, 그게 곧 사라질 것이다. 돌아가서 그걸 살려야 한다”는 유언을 남기고 72세의 일기로 하와이에서 생을 마감했다.

 
 











 

 

 

● 지영희국악관과 다양한 프로그램 

평택시는 지난 2015년 6월, 한국소리터 어울림동 1층에 지영희 명인의 생애 및 업적을 알리기 위해 161㎡(48평) 규모의 전시관을 마련했다.

전시관에는 지영희 선생이 생전 사용하던 악기와 오선보에 직접 작성한 악보, 민요채보 시 사용하던 자전거, 음반 등이 전시돼 있으며, 학술대회·공연·악기 교육 등의 프로그램도 이뤄지고 있다. 

아울러, 지영희 명인의 국악에 대한 열정과 정신을 잇기 위한 지영희국악창작공모전, 지영희국악대회, 해금 아카데미, 지영희 명인 일대기 웹툰 제작, 지영희예술제 등 다양한 행사 및 대회가 열리고 있다.

마지막으로 ‘지영희’라는 평택의 역사인물에 관한 전시관으로 기획되고 구성된 만큼, 평택시민이라면 한번쯤 방문해보는 것도 좋은 경험과 배움이 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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