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자의 고사성어를 아는 사람들은 붕정만리(鵬程萬里)란 말을 들어 본 적이 있을 것이다. 그리고 중국에서는 이 단어를 흔하게 접할 수 있는데 그 직접적 해석은 “붕이라는 새가 한번에 만리를 날아간다”는 뜻이다. 이 말은 상대방이 더 큰 포부를 가지고 웅비하라는 축복의 뜻으로 사용되는 단어이다. 

이 ‘붕정만리’의 유래는 장자가 쓴 소요유(逍遙遊)편에 실려있다. 장자는 “북쪽 바다에 곤(鯤)이라는 물고기가 있다. 이 물고기가 변해서 새가 되는데 그 이름이 붕(鵬)이다. 붕의 등은 몇 천리가 되는지 알 수가 없다. 힘껏 날아오르면 날개가 하늘을 가득 채운 구름과 같다. 이 새는 바다 기운이 움직여 큰 바람이 불 때 바람을 타고 남쪽 바다로 가려고 한다”라고 적고 있다. 

여기서 더 재미있는 것은 매미와 참새가 붕을 비웃는 대목이다. “왜 저 붕(鵬)은 수만리나 올라가 남쪽으로 가지 어리석은 거야”, “저 붕은 어디까지 가려고 저러지, 우리는 이 숲속에서도 충분히 재미있는데”라고 비아냥거린다. 

붕(鵬)과 참새의 이야기는 우리에게 인생의 가치를 어디에 두고 살 것인가에 대한 성찰을 요구한다. 서로 다른 인생관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생각하면 그 시시비비는 무의미한 것인지도 모른다. 

이렇게 우리에게 삶의 가치관에 대한 화두를 던진 장자는 노자와 함께 도교를 창시한 인물로 널리 알려져 있다.

그의 기본적인 철학은 노자(老子)와 일맥상통하고 공자와 유교를 비판하였다. 그의 눈에는 유교가 주장하는 인의예지(仁義禮智)등이 단순한 말장난에 불과하고 진정으로 사람들에게 행복을 주지 못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가 주목한 것은 거창한 정치나 국가 대사와 같은 것이 아니라 세상일과 사람들의 심리적인 것들에 몰두했으며 주로 비유법을 즐겨 사용했다. 그 대표적인 것이 우리가 익히 잘 알고 있는 ‘나비의 꿈(胡蝶之夢)’이다. 장자가 쓴 제물론(齊物論)에 등장하는 나비와 관련한 꿈의 이야기다.

“내가 어제 밤에 꿈속에서 나비가 되어 꽃 사이를 즐겁게 날았는데 너무 기분이 좋아 내가 나인지를 잊어 버렸다. 그리고 꿈에서 깨어보니 내가 나비가 아니라 장자였다. 그렇다면 나는 나비가 된 꿈에서 깬 것인가, 아니면 나비가 꿈에서 내가 된 것인가? 지금 나는 나인가 아니면 나비가 나로 변한 것인가?”라고 장자는 말하고 있다. 

단순히 이 내용만 읽으면 그냥 꿈으로 치부할 수 있으나 이 안에 장자의 철학이 담겨있다. 바로 세상과 내가 하나가 된다는 물아일체(物我一體)의 가치가 숨겨져 있다. 우리가 흔히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은 나와 타인으로 쉽게 경계를 만들고 피아를 구별하고 흑백을 논하는데 익숙해있다. 많은 사상은 선과 악, 자기편이 아니면 적이라는 경계를 만들어낸다. 

장자가 살았던 혼탁한 시기에 무한 경쟁으로 끊임없는 전쟁이 벌어지던 시기에서 벗어나고 싶었던 하나의 절규와 갈망이 이렇게 그의 저작들을 통해서 분출되었는지도 모른다. 그는 이러한 사회적으로 규정된 것들을 깨뜨리고자 노력했다. 선함과 악함, 삶과 죽음, 나와 너라는 이분법에서 이 세상의 모순들이 극한적으로 발전하고 서로를 원망하고 죽이려고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이를 넘어서는 그 무엇을 ‘도(道)’라고 생각했다. 

그렇다면 장자가 생각하는 ‘道’는 무엇일까? 여기서 노자와 만나게 되는데 세상 모든 것은 끊임없이 변화하고 이를 깨우쳐야 우주의 섭리를 알 수 있다고 믿었다. 장자는 그 변화는 바로 자연의 순리이며 사람들은 개인의 욕망과 탐욕을 내려놓고 자연의 모습으로 돌아가라고 설파하였다. 이를 통해 인간은 자연과 하나가 되고, 물아일체의 상태에 몰입하게 된다는 ‘무위자연(無爲自然)’의 상태가 된다는 것이다. 우리는 ‘무위(無爲)’를 마치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처럼 오해하지만 그 의미는 세상 앞에 보다 겸손한 자신을 찾으라는 뜻으로 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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