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 전 신학대학원 입학 즈음의 일이었다. 입학식이 있기 전에 성경원어를 미리 익히고 들어가는 프로그램 때문에 두 주간동안 학교 기숙사에 머물렀다. 교정(校庭)에서 교수님과 마주쳐 인사를 나누고 있었다. 그때 마침 학교 선배들이 차를 타고 나가려다 교수님을 발견하고는 멈추어 교수님께 인사를 드렸다. 

점심 때 외부로 식사를 하러 나가는 중이었단다. 그런 선배들에게 교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외식하러 가는 자들이구먼!” 그 소리를 듣고 차 안의 선배들이나 옆에서 듣고 있던 우리들도 웃음을 터트렸다. 

똑같이 우리말로는 발음이 같은 ‘외식’이지만, 성경에 나오는 ‘외식’은 의미가 전혀 달랐던 것이었다. 교수님의 말씀은 동음이의어를 가지고 한 위트 있는 워드플레이(wordplay)였다. 외부에 나가 식사하는 것을 ‘외식’(外食)이라고 하지만, 성경이 말하는 ‘외식’(外飾)은 위선자의 행동을 의미한다. 외식은 자신을 사람들 보기에 아름답게 포장하기 위한 여러 행동을 통칭한다. 

예수께서는 제자들을 가르치시면서 외식하지 말라고 수차례 경고하셨다. 예수께서 산등성이에서 제자들에게 가르치신 ‘산상수훈’에서도 외식의 문제는 중요한 이슈였다(마태복음 5장). 

남을 도울 때도 도와준다는 티를 냈다. 그들은 상대방의 어려운 사정보다 다른 사람들에게 받을 칭찬과 인정에 관심이 있었다(마 6:1-2). 

경건한 유대인들은 하루에 세 번씩 정한 시간에 기도를 드렸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일부러 정해진 시간이 가까우면 사람이 많이 왕래하는 곳으로 갔다. 거기서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기도를 드렸다. 사람들이 듣도록 멋있는 자세와 말로 기도를 드린 것이다. 기도의 진정한 청중은 하나님이 아닌 사람들이었던 셈이다(마 6:3-5).

경건한 사람들은 정기적으로 금식하기도 했다. 생존에 꼭 필요한 음식섭취도 잠시 미뤄두고 오로지 하나님께 집중하는 시간을 보내는 것이다. 금식은 그래서 신앙적 열심의 한 형태였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자신이 금식하고 있음을 사람들이 알아주기를 바라서 일부러 초췌한 모습을 하고 나타났다. 그의 마음이 하나님을 향한 것이 아니라 사람을 향해 있었던 것이다(마 6:16). 

우리는 진심이 아닌 위선으로 다른 사람에게 자신을 좋게 보이기 위해 한 행동을 비난할 수 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의 목적은 단순히 이러한 위선을 고발하기 위한 것이 아니었다. 바른 구제, 바른 기도, 바른 금식이 무엇인가를 알리기 위함이었다. 

어떤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의 위선을 알아채고 비판하는 것을 자신의 실력으로 착각한다. 불우 이웃돕기 성금으로 누가 얼마를 냈다는 기사가 나오면 그것을 위선이라고 쉽게 단정해 버린다. 그러면서 이렇게 말한다. “나는 저렇게 위선 떨 거면 차라리 안 해!”

그러나 사실 여부를 떠나 그렇게 위선을 떠는 사람보다 그것을 비난하는 내가 더 실력이 있는 걸까? 내가 위선을 떨지 않고 조용히 남을 돕는 것이 진정한 실력이다. 

외식하지 말라고 가르치신 예수님은 구제에 대하여 “너는 구제할 때에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 네 구제함을 은밀하게 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너의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고 하신다(마 6:3-4). 

기도에 대하여는, “너는 기도할 때에 네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고 말씀하신다(마 6:6). 

금식에 대해서도, “너는 금식할 때에 머리에 기름을 바르고 얼굴을 씻으라. 이는 금식하는 자로 사람에게 보이지 않고 오직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보이게 하려 함이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고 하신다(마 6:17-18).

무엇인가를 하지 않음이 실력이 아니라, 제대로 무엇인가를 할 수 있음이 실력이다. 아무 것도 안하면서 비난하기보다, 겉모양으로라도 열심히 하다가 진심으로 하게 되면 더 좋지 않을까? 외식보다 더 무서운 것은 비판할 뿐이지 전혀 행동하지 않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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