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자는 백이와 숙제에 관해서는 의(義)와 인(仁)을 쫓았고 그로 인해 죽음을 거부하지 않은 인물로 높게 평가했다. 한편 사마천은 어질지 못한 군주에 대한 맹목적인 충성은 옳지 않은 것이라고 판단하였는데 이는 마치 맹자의 사상과도 일맥상통한다고 할 수 있다. 

공자는 부귀의 중요함을 일찍이 알고 있었는데 만약 부귀를 얻을 수 있으면 말채찍을 잡는 마부라고 하겠지만 그렇지 못하다면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하겠다고 했다. 그 말은 무리한 방법으로 욕심을 내서 이룰 수 있는 것이 없으니 자신이 잘하고 좋아하는 것을 하고 사는 것이 인생의 도리라고 일깨워주는 것이기도 하다.

그는 또한 그는 추운 겨울이 되어서야 소나무와 잣나무가 시들지 않고 항상 푸르름을 알 수 있다는 말도 남겼다. 내 주위의 좋은 친구나 가족, 사람들을 잘 대하지 않으면 어려움을 만났을 때 그 소중함을 알지만 만시지탄이라는 것도 지적했다.  

관중과 포숙아의 이야기에서 보면 관중은 포숙아 덕분에 재상의 자리에 오를 수 있었고 뛰어난 업적을 남겼다. 공자의 눈에는 친구를 이용하고 권모술수에 능한 관중이 좋게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지금의 시각으로 보면 관중은 현실주의적 접근법을 이용하여 다양한 전략과 전술에 능한 능력자로 보인다. 공자의 도덕주의와 관중의 현실주의가 부딪치는 한 대목이다. 

일찍이 포숙아는 관중을 천거하면서 제나라의 환공에게 만약 단순히 제나라를 통치하는 것에 만족한다면 자신이 있으면 가능하다고 말했다. 그러나 천하의 패자가 되려고 한다면 관중이 있어야 한다고 말하고 그를 중용할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주었다. 

관중은 가정 형편이 어려워 늘 친구인 포숙아의 신세를 지고 살았다. 관중은 훗날 이렇게 말했다. “포숙아가 나와 함께 장사를 하는데 더 많이 가져가도 뭐라고 하지 않았다. 이유는 내가 가난한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또 벼슬길에 올랐다가 세 번이나 내침을 당했지만 포숙아는 뭐라 하지 않았다.

그 이유는 아직 때가 되지 않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내가 전쟁터에 나갔다가 모두 도망쳤지만 뭐라고 하지 않았다. 그 이유는 내가 노모를 모시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라고 하였다. 

실제로 포숙아는 관중을 추천하고 재상의 자리에 올랐을 때 자신은 관중의 밑에 있었지만 전혀 불만을 가지지 않았다. 아마 지금의 많은 권력자들이나 사람들은 질투심에 눈이 멀어 어떻게 하든 끌어내리려고 했겠지만 포숙아는 넓은 포용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한 이유로 포숙아와 자손들은 제나라에서 영지를 받아 자손 대대로 세상의 존경을 받는 집안이 되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관중의 지혜로움을 칭찬하기 보다 오히려 사람을 볼 줄알고 포용심과 겸손의 덕을 갖춘 포숙아를 더 높게 평가하였다. 

재상으로 관중은 실제 탁월한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가 제나라의 재상이 되었을 때 제나라는 산동성과 그 연해 지역의 가난한 나라였으나 오히려 이를 기회로 삼아 다른 나라와 무역을 시행함으로서 국가의 부를 창출했고 군대를 강하게 키웠으며 백성들과 동고동락을 하였다. 

관중의 사상 중에서 눈여겨 볼 것은 “곳간이 차야 인심이 난다” 라는 말처럼 의식주가 해결이 되어야 나라도 개인도 편안해질 수 있다는 당연하지만 쉽지 않은 철학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나라를 다스림에 있어 ‘예의염치(禮義廉恥)’가 있어야 나라가 흥할 수 있고 그렇지 못하면 나라가 망한다고 주장했다.

또한 국가의 정책이란 물이 흐르듯이 순리대로 하면 민심이 따르고 그렇지 않으면 백성들이 따르지 않아 국가에 위기가 온다고 했다. 그의 정치 철학은 지금의 정치가나 행정가가 꼭 명심해야 할 말들이다. 지도자들은 혹시 자신이 당리당략과 이기심에 매몰되어 국민에게서 멀어지고 있지 않은지 성찰해야 할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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