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로수가 은행나무인 동네다. 

미화원이 쓸어 담은 파란봉지에 꾹꾹 눌러 담긴 잎들과 바닥에 뒹구는 잎, 밟혀서 진토(塵土) 되어가는 그 위를 무심하게 걸어간다.

아쉽고 쓸쓸한 마음은 내 마음이고 노란 울음의 주인공은 한 시절 마감하고 떠난다.

‘인간사에는 안정된 것이 하나도 없음을 기억하라.

그러므로 성공에 들뜨거나 역경에 지나치게 의기소침하지 마라’는 소크라테스 말을 기억하면서 매년 겪는 현상, 소똥만 굴러가도 깔깔대며 웃던 그때와 다르지 않은 걸보니 인간은 풍부한 감정과 감성소유자가 분명하다.

있다와 없다, 유(有)와 무(無)의 현상에서 자유로워져야하는데 나이를 먹으니 쓸데없이 눈물이 많아진다.

눈물은 기쁨과 슬픔 전유물은 아니다.

조그만 일에도 서운하고 분노하고 불안해하는 마음의 부산물이 그렇게 만드는 것인데 그 조급증들은 쉽게 그런 것들과 화해를 시키지 않는다.

불면으로 새벽에 일어나는 일 쉽지 않다.

밀린 일들이 있어 잠을 몰아내고 앉으니 머리가 맑아온다.

여섯시 반이지만 허공은 어둠의 색을 지우지 않는다.

절기의 변화에 따라 천천히 물러나갈 고요하고 순응하는 자연계 법칙을 눈으로 목격하니 새벽 활용법이 새로워진다.

새벽에 하루를 이끌어 가는 생들은 무수히 많다.

인력시장 일거리를 잡기위해 고단을 버리고 걸어가는 발걸음들, 새벽시장과 이른 하루가 시작되는 모든 삶에 위로를 한다.

김밥가게를 하는 늙은 언니는 지금 홀로 김밥을 말거나 재료준비에 한창일 것이다.

편하게 살아야 하는 나이인데 이제 일을 좀 놓으라고 말한 적이 있다. 

“언제 죽을지 모르는데 더 열심히 해야지”란 도력 깊은 의외의 답을 들으면서 하루살이 같은 생각에 잡힌 좁고 옹졸한 소견의 내가 우습고 부끄러웠다.

에리히 프롬은 내가 바라는 삶이 아닌 남이 보는 관점에서 열심(熱心)히 사람들이 살다보니 삶이 힘든 것이라 했다.

열심히 살지 말자, 열심히 살 뻔했다는 반어적 말들에 잠시 공감했었다.

열심히 산다는 건 열정적이고 순수하다. 

열심히 하는 일의 모든 결과는 만족만을 주지 않는다.

오히려 결과에 미치지 못하여 의욕이 저하되고 그것이 화로 작용하면 좌절하는 인생이 될 수도 있다.

무엇이든 자신의 역량과 환경과 모든 배경을 지혜란 공식으로 풀어가기를 새벽 일기에 적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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