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전국 7웅이 할거하던 시기가 점차 균형이 무너지면서 진(秦)나라의 힘이 강성해지기 시작했다. 진나라와 국경을 맞닿고 있던 한나라, 위나라, 조나라는 내분에 휩싸여 국력이 약화되었다. 또한 북쪽의 연나라와 동쪽의 제나라 그리고 남쪽의 초나라도 진나라의 강력한 군사정책과 이간책에 빠져 점차 힘이 빠지고 있었다. 

이때 서로 각자도생을 하면서 자신의 능력을 발휘하여 생존하고 활약한 인물들이 있었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모두 4명이었는데 중국에서는 이들을 전국사공자(戰國四公子)라고 불렀다. 그중에서도 대표적인 인물로 제나라의 맹상군을 들 수 있다. 

당시 군주들의 힘이 약해지면서 그 참모들이 힘을 쓰기 시작했는데 그 참모들을 일컬어 식객(食客)이라고 불렀다. 식객은 전국시대 말기에 성행했던 인물들로 당시 권세가나 군주의 집에 들어가 살면서 필요할 때 그를 위해 지혜를 빌려주거나 또는 대신 일을 맡아서 처리해주었다. 

맹상군은 원래 설(薛)이라는 작은 지역의 영주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많은 첩을 거느리고 있었고 그의 아들들이 40명이 넘었다. 맹상군은 음력 5월 5일에 태어났는데 영주는 첩에게 맹상군을 키우지 말고 버리라고 명령했다. 그러나 첩은 자식을 버릴 수 없어 몰래 키웠다. 

나중에 맹상군이 커서 아버지를 만나게 되었는데 아버지는 첩에게 왜 버리지 않았는가라고 힐책하고 나무랐다. 그러자 맹상군은 왜 자신을 버리라고 했는가를 물었더니, 5월 5일에 태어나서 문설주만큼 키가 크면 부모를 해친다는 말이 있어서라고 했다. 그러자 맹상군은 인간의 운명이 하늘에서 정해지는지 아니면 문설주에 의해 정해지는지를 물어보자 아버지는 아무말도 하지 못했다. 

이후 맹상군의 능력을 알아본 영주는 집안 일을 그에게 도맡아 하도록 명령했고 그에게 신뢰를 보냈다. 맹상군은 당시 전국에서 능력있는 식객들이 자신을 찾도록 잘 대해주었고 소문이 나자 많은 사람들이 그에게 의탁하기 위해 몰려왔다. 

맹상군은 자신의 아버지가 죽은 후 영주가 되었고 식객을 계속해서 받아들여 수천명에 달했다. 그는 모든 식객들에게 귀천에 상관없이 공평히 대우했다. 그가 처음 식객을 만날 때 항상 식객의 부모와 형제에 관해 물어보고 그의 친족들을 방문하고 선물을 하여 식객이 자신에게 충성을 다하도록 유도했다. 

하루는 어떤 식객과 같이 밥을 먹는데 갑자기 등불이 꺼지자 식객은 자신과 맹상군의 음식이 다르다고 오해했으나 나중에 똑같다는 것을 알고 부끄러워 자결하기도 했다. 이렇듯 맹상군을 찾는 식객이 많아지고 명성이 높아지자 진나라의 왕이 맹상군을 만나기를 청했다. 

그러나 그의 식객 중에 소대라는 사람이 자신이 꿈을 꾸었는데 진흙인형과 나무인형이 서로 싸웠다고 했다.

진흙인형은 자신은 비가 오면 그냥 흙으로 돌아가지만 나무인형은 물에 떠내려가 어디로 갈지 모른다는 비유를 들면서 진나라에 가면 돌아오지 못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맹상군은 그 말을 듣고 진나라에 가는 것을 포기했다. 

훗날 맹상군이 진나라를 방문하였을 때 진나라왕에게 사로잡히는 일이 발생했다. 그는 자신을 구명하기 위해 진나라 왕의 애첩이 원하는 물건을 가져다 주어야 했다. 이때 그의 식객중 한 사람이 개도둑 출신이었는데 애첩이 원하는 물건을 훔쳐다 주었다. 이제 석방이 되어 국경을 넘으려는데 진나라 왕이 다시 맹상군을 잡아오라고 명령했다. 당시에는 성문이 닭우는 소리에 열렸는데 식객중 한사람이 닭우는 소리를 잘내어 성문을 통과하여 피신할 수 있었다.   

맹상군이 식객 정치를 통해 자신의 입지를 만드는 것에 원칙이 있었다. 첫째는 인재를 등용하고 사람을 받아들이는데 귀천을 따지지 않았으며, 둘째는 받아들인 사람들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대했다는 것이다. 맹상군의 인재 등용법은 오늘날에도 그 원칙이 적용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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