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답을 다 알고 푸는 시험문제는 그야말로 ‘식은 죽 먹기’다. 참고서에 풀어야 할 문제가 너무 많을 땐 정답지를 미리 보고 답만 체크하면서 공부하던 때도 있었다. 우리 인생도 이처럼 정답을 모두 알고 살아간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런데 미국의 저명한 기독교 윤리학자인 스텐리 하우어워스 교수는 그의 책 <한나의 아이>에서 기독교인의 삶을 이렇게 정의한다. “기독교인이 된다는 것을 배우는 것은 답이 없이 사는 것을 배우는 것이다.” 

이 말은 심각한 정신병 환자인 아내로 인해 온갖 고통과 절망의 시간을 겪으면서 기독교 신앙을 자기 나름대로 정리한 것이다. 그는 또한 말한다. “인생이 왜 이러냐고? 묻지 마라. 모른다.” 

신정론(神正論)을 부정하는 그의 주장은 필자가 받아들일 수 없지만, 적어도 우리네 인생이 모든 답을 갖고 신앙생활을 하지 않는다는 것, 때로는 답을 알지 못한 채 말할 수 없는 절망의 상황을 견디며 살아야 한다는 측면에서는 적극적으로 동의한다. 

‘답이 없이 사는 것을 배우는 것’이 신앙생활이란 말은 결국 모든 인생의 답에 나에게 주어지지 않았음을 암시한다.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냐 너희는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약 4:14). 

‘surrender’라는 영어 단어는 동사와 명사로 쓰여, ‘항복, 명도, 인도, 양도, 포기’ 등 다양한 의미를 가진다. 이 단어는 신앙적인 면에서 ‘내려놓음’ 혹은 ‘자기 포기’의 뜻으로도 사용된다. 하나님께 자기의 모든 권리를 양도하거나, 그 인생을 하나님의 뜻에 맡기겠다는 결단을 포함한다. 

이러한 결단은 한치 앞도 내다보지 못하는 인간의 무능과 무지를 인정함과 동시에 하나님을 신뢰함으로 내어맡긴다는 뜻이 함께 담겨있다.

예수님의 제자 베드로가 설교하자 5,000명이 넘는 사람이 회심하였다. “말씀을 들은 사람 중에 믿는 자가 많으니 남자의 수가 약 오천이나 되었더라”(행 4:4). 이와는 대조적으로 스데반은 한 번의 설교 때문에 단 한명의 회심자도 없이 사람들의 돌에 맞아 죽었다(행 7:59-60).

누구는 복음을 전하자 수천 명이 회개하는 결과를 가져왔는데, 또 누구는 아무런 결실도 보지 못한 채 비참하게 순교당하고 만 것이다. 과연 누구의 삶이 더 위대한 것인가? 스데반의 죽음은 과연 헛된 것인가? 

우리는 이에 대해 함부로 말할 수 없다. 외적으로 보이는 결과만으로 성공과 실패를 함부로 단정지울 수 없다.

스데반의 순교는 당장 아무런 결과가 없는 것 같았지만, 그를 죽이도록 사주했던 사람이 훗날 세계 선교의 관문을 열었다는 사실을 보면 더욱 그렇다. 그 사람이 바로 위대한 세계 선교사인 사도 바울이다.

그래서 누군가의 삶에 대해 함부로 재단할 수 없다. 누구의 삶이 더 나은 것인지는 하나님만 아신다. 그저 내게 주어진 삶의 자리를 묵묵히 지키며 꿋꿋이 살아갈 뿐이다.  

오래 전 지인이, 나중에 천국에 가면 하나님께 내 인생이 왜 그랬어야만 했는지를 물어보겠다고 했던 말이 귓가에 맴돈다. 오늘을 사는 나는 모든 정답을 알지 못한다. 수많은 고민과 회의 속에서 밤잠 이루지 못하던 불면의 날들을 거쳐 살아서 결국은 그 정답에 근접해 가는 것일지 모른다. 

인간이 당할 수 있는 고난의 종합세트를 받아든 욥은 이렇게 고백했다. “그러나 내가 가는 길을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순금 같이 되어 나오리라”(욥 23:10). 

내가 가는 길이지만 정작 그 길을 잘 알지 못한다.

그러면서 지금도 그 길을 걷고 있다. 결국 내려놓음이란 뜻을 알 수 없는 삶의 현실 속에서도 정답을 알고 계시는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기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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