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카게 살자” 조직폭력배를 다룬 영화들 가운데 이런 문구가 종종 등장했다. 맞춤법도 틀린 이 문구를 몸에 새기는 경우도 있었다. 새 인생을 살겠다고 마음먹고 그 의지를 자신의 몸에 표현한 것이리라. 그런데 몸에 그런 문신을 하고 여전히 조폭에 몸담고 있는 이들도 있었다. 그래서 그들이 말하는 착함이란 무엇이었을까 생각해 보기도 했다.

몇 주 전 필자가 섬기는 교회의 담임목사 위임식에서 어느 선배 목사님이 하신 권면이 떠올랐다. 지적 실력과 영적 실력을 함께 기르라는 권면이었다. 그리고 목회자와 성도 모두에게 해당된다는 권면 하나를 하셨다. 그것은 “착해야 한다”는 것이다. 

착한 게 뭘까? 사전적 의미는 “언행이나 마음씨가 곱고 바르며 상냥하다”는 것 인데. 그렇게 마음에 썩 와 닿지 않았다. 

성경에서는 착함과 관련하여 무엇을 말씀하고 있을까? 맡은 일에 성실하고 충성하는 것을 착한 것과 연관지어 설명한다. “그 주인이 이르되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적은 일에 충성하였으매”(마 25:21). 착한 것과 충성된 것을 동일선상에 놓았다. 맡겨진 일에 최선을 다하여 성실한 것이다. 착함은 너그러운 마음으로 다른 이들을 돕고 섬기는 행동을 말하기도 한다. “하나님이 능히 모든 은혜를 너희에게 넘치게 하시나니 이는 너희로 모든 일에 항상 모든 것이 넉넉하여 모든 착한 일을 넘치게 하게 하려 하심이라”(고후 9:8). 모든 일에 항상 모든 것이 넉넉한 것, 그래서 모든 착한 일을 넘치게 하는 관대함이다. 

또한 착함은 어두운 곳에 빛을 비추는 것이다. 어둡고 인정이 메마른 곳에서 마음을 촉촉하게 만드는 한줄기 빛을 드러내는 일이다.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마 5:16). 관대한 마음으로 누구에겐가 유익을 끼치는 행동이다. 

착한 것은 도덕적 삶이며 믿음과도 관련 있다. “믿음과 착한 양심을 가지라 어떤 이들은 이 양심을 버렸고 그 믿음에 관하여는 파선하였느니라”(딤전 1:19). 도덕적 부패는 영혼의 파멸로 이어진다. 

무엇보다 필자는 착함과 관련하여 이 말씀을 떠 올렸다. “좋은 땅에 있다는 것은 착하고 좋은 마음으로 말씀을 듣고 지키어 인내로 결실하는 자니라”(눅 8:15). ‘착하고 좋은 마음’을 영어성경에서는 ‘noble and good heart’라고 번역했다. 그야말로 열린 마음이요, 상대방의 말을 경청하는 것이요, 의심의 눈초리를 걷어내고 신뢰하며 수용하는 마음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에 이런 마음 자세가 필요하다는 것인데, 그 범위를 넓히면 모든 일에 이런 마음 자세를 가진 것을 착함이라 할 것이다. 

며칠 전 농사일을 하는 장로님과 함께 차를 타고 가다 나눈 이야기가 있다.

큰 농사는 아니기에 보통은 가족들과 주변 형제들에게 나눌 만큼 정도의 수확양인데, 그 양이 좀 많으면 주변에 내다 팔기도 한단다. 그럼 가격을 어떻게 매기느냐고 하자 시장에서 형성되는 가격을 참고로 한다고 한다. 그런데 시장에서 사는 것보다 농가에서 사면 좋은 점이 있단다. 덤이 따라 온다는 것이다.

장로님의 모친의 경우는 이익 손해를 굳이 따지지 않고 덤으로 두둑하게 막 퍼주기도 한단다. 

자로 잰 듯이 계산적이고 이해득실을 따지거나 야박하지 않고, 좀 푸근하고 여유를 가진, 그래서 상대방에 대해 방어적이거나 공격적이지 않고 환영의 마음을 가진 상태가 착함이 아닐까? 순박하고 어진 마음, 마치 예전 시골인심같이 말이다. 

권면하신 목사님은 나에게 계산적이지 않고 모난 데가 깎여져서 둥글둥글하고 순박하고 우직하여, 세련된 겉치레가 아닌 투박하더라도 진심으로 다가서는 그런 목회자를 말했던 것일까? 꼭 시골에 있는 교회라서가 아니라. ‘닳고 닳은 도시적 민첩함과 세련됨이 아닌 진심이 담긴 목회를 하라는 말로 읽었다.

‘착하게 살자’, ‘착한 마음’. 두고두고 곱씹어 보게 되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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