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날 초등학교시절 가을이 되면 ‘가을 운동회’로 학교는 온통 축제 분위기였다. 운동회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대표적인 경기는 ‘이어달리기’였다. 이어달리기는 “같은 편을 이룬 선수들이 일정한 구간을 나누어 맡아 차례로 배턴을 주고받으면서 달리는 경기”이다. 

필자는 이어달리기의 사전적 정의를 찾아보고서야 ‘바통’ 혹은 ‘바톤’으로 알고 습관적으로 사용했던 단어의 표준어가 ‘배턴’임을 비로소 알게 되었다. 다음 주자에게 배턴을 전달하는 행위도 그래서 ‘바톤 터지’가 아닌 ‘배턴 터치’가 맞는 말이다. 

이어달리기는 주자의 순서를 어떻게 구성하는지와 같은 작전 구상이 중요했다. 발 빠른 사람을 선두에 세울 것인지, 아니면 마지막에 세울 것인지 등에 관한 것이다. 그때 각 팀들은 자못 진지하고 심각하게 순서를 정했던 기억이 난다. 

처음부터 선두 격차가 너무 벌어져서 골인하는 경우엔 큰 흥미를 끌지 못했다. 반면에 계속 꼴찌를 달리던 팀의 마지막 주자가 배턴을 이어받아 앞사람을 차례로 제치고 선두로 골인하는 사건이 벌어지기도 했다. 역전의 드라마요 감동의 드라마였다. 승리한 팀은 온통 흥분과 열광의 도가니가 되었고, 선두에 서서 줄곧 승리를 낙관했던 팀은 이 무슨 일이 벌어진 건가하는 허탈감에 빠지기도 했다. 

배턴을 넘겨주는 과정에서 배턴을 떨어뜨리는 일도 있었다. 여기저기서 탄식의 소리가 흘러나왔다. 빨리 일어나서 다시 달리라는 응원과 함께, 이 기회에 선두를 확고히 하라고 자기 선수에게 외치는 상대편 팀의 소리가 뒤섞였다. 

이어달리기 경주는 말 그대로 한 사람이 처음부터 끝까지 완주하는 경기가 아니다. 각자 주어진 구간을 열심히 달리고 다음 사람에게 배턴을 잘 인계해 주어야 하는 단체경기이다. 이어주고 이어 받는다. 

지난 주 기좌리교회의 중요한 배턴 터치가 있었다. 30년간 기좌리교회를 섬기신 목사님을 원로목사로 추대하고, 필자가 담임목사로 위임되는 예식이었다. 배턴 터치하여 교회를 이끌어갈 필자에 대한 축하와 격려가, 그리고 지금까지 열심히 달려오신 목사님의 수고에 대한 감사와 인정과 위로가 이어졌다. 선배의 뒤를 이어 이제 달려가야 할 나로서는 무거운 책임감을 느꼈다. 

성경에는 배턴 터치, 즉 뒤를 이어가는 계승에 대한 이야기들이 많이 등장한다. 구약시대의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족장사(族長史)는 언약을 이어주고 이어가는 역사였다. 모세와 여호수아는 출애굽 세대와 가나안 정복세대를 이어가는 배턴 터치의 역사였다. 다윗과 그 뒤를 이어간 다윗왕가는 왕정시대의 역사를 이어주고 이어받았다. 엘리야선지자와 엘리사선지자, 그리고 선지학교는 선지자의 계대를 이어가는 이야기이다.

성경에 자주 등장하는 족보 자체가 이어주고 이어가는 역사의 전형이다.  

신약시대 와서 사도 바울과 디모데의 복음전파 사역의 배턴 터치도 있다. 그런 사역의 계승의 원리를 성경은 이렇게 말씀한다. “또 네가 많은 증인 앞에서 내게 들은 바를 충성된 사람들에게 부탁하라 그들이 또 다른 사람들을 가르칠 수 있으리라”(딤후 2:2).

지금의 역사는 과거에 면면히 흘러온 배턴 터치를 통해 이루어져 온 역사이다. ‘이어간다’는 말의 소중함을 생각한다. 지나온 세대는 다음 세대에게 그 배턴을 넘겨주어야 할 때가 온다. 부모와 지식이 그러하고, 기성세대와 다음세대가 그러하다. 이어주고 이어받는다. 

이어받는 이가 없다는 것은 슬픈 일이다. 무형문화재나 전통장인의 기술을 이어갈 사람이 없어 명맥이 끊긴다는 이야기도 들린다. 한 사람의 화려한 영웅보다 후세대를 길러 이어가는 리더십이 필요하다. 지나온 시대의 열매를 잘 간직하고 후대를 더욱 새롭게 발전시켜 가는 ‘이음’이 필요하다. 사회 전반에서 아름다운 배턴 터치가 계속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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