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픔의 유통기한은 언제까지일까? 옛날 어느 임금이 나이 많은 신하에게 물었다. “아버지 돌아가셨을 때가 더 슬펐는가? 자식이 죽었을 때가 더 슬펐는가?” 신하가 대답했다. “아뢰옵기 황공하오나 어느 쪽이 더 슬펐는가는 알 수 없습니다. 다만 신에게 어느 쪽이 더 슬펐느냐고 차이를 물으신다면 이렇게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에는 눈앞을 가리는 눈물 때문에 먼 산을 바라다보면 산 끝머리가 흐릿하게 보였습니다. 하지만 자식이 죽었을 때는 그마저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너무나 울어서 아예 눈앞에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는 것이다. 

몇 해 전 암으로 사랑하는 아들을 먼저 떠나보낸 팔순의 어머니가 있다. 그런데 올해 딸이 불의의 사고로 먼저 세상을 떠나는 단장의 아픔을 겪었다. 무슨 말로 어떻게 위로를 할 수 있을까? 그 슬픔을 어떻게 다 헤아릴 수나 있을까... 

자식이 죽으면 가슴에 묻는다는데, 하나도 아닌 둘을 연거푸 잃은 어미의 마음은 오죽할까?

부모를 잃으면 고아라 부른다. 남편을 잃으면 과부라 부르고, 부인을 잃으면 홀아비라 부른다. 그런데 자식을 잃은 부모에게는 다른 이름이 없다. 

그런 일이 있고 나서 몇 주가 지났다. 그런데 주일 예배에 올 때마다 딸을 잃은 그분을 깊이 안아주는 분이 계셨다. 몇 주 동안 그런 광경을 보다가 문득 든 생각이 있었다. 나 또한 그 아픔을 늘 공감한다고 생각해 왔지만, 과연 얼마나 깊이 그 슬픔에 공감하고 있었는지를 말이다. 

사람들은 보통 지인의 장례가 나면 찾아와 슬픔을 함께한다. 하지만 몇 주가 지나고 나면 서서히 슬픔의 농도는 희미해져간다. 그리고 마치 어디에나 늘 있어온 이별 중 하나인 것처럼 잊혀지고, 일상으로 돌아간다. 

하지만 사랑하는 가족을, 더구나 자식을 잃은 부모는 몇 해가 지난다고 해서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일상으로 돌아가지 못한다. 자식을 잃은 부모에게 슬픔의 유통기한이란 없는 셈이다. 그 애통함은 결국 이 땅에 사는 동안에는 고스란히 간직된다.

교우들의 가정을 심방하던 중 교우가 아는 어느 목사님 이야기를 들었다. 그분은 딸만 다섯을 두고 마지막 아들을 낳았는데, 그 아이가 여섯 살 되었을 때 불의의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나게 되었다. 주일이 되었는데 그 목사님이 설교 강단에서 이렇게 말하였다고 한다. 그동안 교우들의 가족이 세상을 떠나면 목회자로서 당연히 유가족들을 위로하고 함께 슬퍼했었지만, 이제야 정말 교우들의 아픔과 슬픔을 위로할 수 있는 자격을 얻은 것 같다고 말이다. 

자식을 연거푸 잃은 분을 감싸 안으며 위로했던 교우는 몇 해 전 자신의 딸이 먼 타국에서 큰 뇌수술을 받게 된 일이 있었다. 생사를 장담할 수 없는 딸의 수술을 앞두고, 당장 그곳으로 갈수 없는 부모는 만나는 사람마다 기도해 달라고 애타게 간청했다고 한다. 수술은 잘 되어 건강하게 되었지만, 그 때 딸을 잃을 수 있었다는 그 절박함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었다. 그래서 더욱 딸을 먼저 보낸 분의 심정을 헤아릴 수 있었으리라. 

 ‘상처받은 치유자’라는 표현이 있다. 우리는 모두 크고 작은 상실의 아픔이 있다. 상처받은 치유자는 자신의 아픔과 상처를 신앙의 힘으로 극복하고, 더 나아가 아픔 당한 다른 사람의 상처를 공감하고 치유하는 역할을 한다. “우리의 모든 환난 중에서 우리를 위로하사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받는 위로로써 모든 환난 중에 있는 자들을 능히 위로하게 하시는 이시로다”(고후 1:4). 그런 위로는 단순히 상처를 잊게 하는 것으로가 아니라 천국의 소망이 있기에 가능해진다. 

그래서 나는 성경의 이 말씀이 참 좋다. “보라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계시리니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그들과 함께 계셔서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닦아 주시니 다시는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계 21: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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