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수선한 중에 추석을 맞이하게 되었다.

그렇지 않아도 이른 추석인데다, 태풍까지 겹쳐서 이번 주 초반에는 시시각각 들려오는 태풍 속보 방송에 귀 기울이며 보내야 했다.

이름도 낯설기만 한 ‘힌남노’라는 태풍은 우리나라뿐 아니라 여러 나라를 공포에 떨게 만들었다. 

올해 초반만 해도 조금 잠잠해질 것 같았던 코로나가 변이 바이러스로 다시 유행했다.

올 8월에는 곳곳에 폭우가 내려 서민들의 시름은 깊어졌다.

그뿐 아니라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이 장기화 되면서 세계적인 경제침체의 늪에서 우리나라도 허우적거리고 있다.

물가상승을 피부로 체감하며 살고 있다.

정치권도 국민들을 힘들게 하고 있다.

초짜티를 너무 내는 대통령이나, 정당 내의 내홍사태에 지리멸렬하고, 친소관계에 따라 이합집산하면서 서로 으르렁거리는 꼴도 볼썽사납다.

어느 곳 하나 백성들의 시름을 달래줄 만한 구석을 찾기 어려운 형국이다. 

하지만 어디 이때뿐이겠는가? 태평성대를 구가하며 국민들 모두가 행복했던 때가 언제 있었을까 싶다.

언제든 고만고만한 어려움들은 있었고, 그 고비 고비를 넘겨 살아온 세월들이 나이테처럼 우리 인생에 새겨져 있다. 

시인 서정주는 국화를 표현하기를, “그립고 아쉬움에 가슴 조이던 머언 먼 젊음의 뒤안길에서 이제는 돌아와 거울 앞에 선 내 누님 같이 생긴 꽃”이라고 노래했다.

질풍노도와 같았던 ‘머언 먼 젊음의 뒤안길’에서, 이제는 세월의 흔적을 고스란히 간직한 채, 어찌 보면 인생을 달관한 것 같기도 하고, 또 어찌 보면 체념과 포기인지도 모를 여유로움이 묻어나는 중년의 모습을 그려보게 한다. 

하지만 인생은 참 쉽지 않다.

맷집이 생겼을 법도 한데 또 다른 위기에 맥없이 휘청거리기도 한다.

고난에 면역은 없나보다. “왜 사냐고 묻거든, 그냥 웃지요”라는 어느 시인의 시어처럼 힘든 인생길을 우걱우걱 그저 걸어갈 뿐이다. 

전염병에, 태풍에, 물가 불안에, 사회적 갈등에 평안하지 못한 우리네 인생에 또 어떤 파고가 닥칠지 알 수 없다.

다윗은 위기를 만나 이런 기도를 드렸다.

“하나님이여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 내 영혼이 주께로 피하되 주의 날개 그늘 아래에서 이 재앙들이 지나기까지 피하리이다”(시 57:1).

평안한 삶은 당연하지 않다. 위기를 만나고 나서야 평안한 삶이 얼마나 큰 감사의 이유인지를 실감한다.

과학이 인생의 모든 문제를 해결하는 마스터키라도 되는 양 우쭐해 하는 현대인들에게 코로나와 같은 질병은, ‘힌남노’와 같은 태풍은 전능하신 하나님 앞에 겸손해야 함을 새삼 깨닫게 한다. 

하나님이 한번 쓸어 가시면 아무 것도 남지 않는 것이 인생이다.

“주의 목전에는 천 년이 지나간 어제 같으며 밤의 한 순간 같을 뿐임이니이다.

주께서 그들을 홍수처럼 쓸어가시나이다 그들은 잠깐 자는 것 같으며 아침에 돋는 풀 같으니이다”(시 90:4-5). 

오늘 하루의 안녕이 당연히 보장된 권리인양 사는 우리에게 인생의 위기는 그렇지 않다는 것을 가르쳐 준다.

하지만 위기가 좀 지나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잊어버리는 것이 우리의 오래된 습관이다.

위기 앞에 그 간절함으로, 그 가난한 마음으로 모든 것을 섭리해 가시는 하나님께 인생을 맡겨드린다면 얼마나 좋을까. 

추석이다.

휘영청 밝은 보름달에 온 가족이 모여 수확의 기쁨을 나누었던 오래된 명절이다.

모든 시름을 뒤로하고 잠시만이라도 서로를 보듬고, 여러 어려움에도 잘 살아왔다고 마치 역전의 용사를 보듯 반갑게 맞이할 일이다.

거친 풍파를 몸으로 살아온 부모세대들에게 존경을 표하고, 많은 인생의 파고를 견뎌가야 할 자녀들에게 등을 토닥이며 용기를 북돋는 시간이다.

위로가 되고 힘이 되는 명절이 되기를 소망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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