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역학 제2법칙이 있다. 열역학 제2법칙은 물질과 에너지는 한 방향으로만 변한다고 규정한다. 즉, 유용한 상태에서 무용한 상태로, 획득이 가능한 상태에서 획득이 불가능한 상태로, 질서 있는 상태에서 무질서한 상태로만 변한다는 것이다. 자연 상태로 가만히 놔두면 점점 더 질서가 잡혀지는 것이 아니라 무질서도 증가하는 방향으로 흐른다는 것이다. 

물리적 자연만 그런 것이 아니다. 인생도 그러하다. 가만히 있으면 점점 더 무질서하고 게을러지는 경향이 있다. 새해가 되면 결심하는 금연에 실패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다이어트에 실패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자기 개발에 실패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대부분 자기 절제를 못하고 타협해 버리기 때문이다. 

“오늘은 말고 내일부터 잘 하면 되지...”라고 타협을 한 나머지 결국은 실패하고 만다. 알면서도 ‘조금만’이라는 함정에 허우적거리다가 제자리로 돌아가 버리고 만다. “5분만 더, 10분만 더” 하다가 늦잠을 자고 지각을 한다. 인생에서 소중한 가치들은 대부분 꾸준한 노력과 자기 절제를 요구한다. 타협하지 않는 노력이 필요하다. 

특히 신자에게 신앙적 타협은 치명적이다. 성경은 세속적 욕망이나 죄에 타협하지 말 것을 경고한다. 구약성경 룻기를 보면, 한 가정이 흉년을 피해 약속의 땅을 저버리고 우상숭배가 가득한 이방인의 땅으로 이사를 간다. “사사들이 치리하던 때에 그 땅에 흉년이 드니라 유다 베들레헴에 한 사람이 그의 아내와 두 아들을 데리고 모압 지방에 가서 거류하였는데”(룻 1:1). ‘거류’(live for a while)라는 말은 ‘임시 체류’를 의미한다. 처음에는 잠깐 소나기만 피해보자는 핑계로 갔다는 것이다. 

그런데 어디 그것이 마음같이 되는가? 2절을 보면 그들이 모압에서 ‘살았다’는 표현이 나온다(lived there). 이것은 임시체류가 아니다. 시간이 흘러 그들이 그곳에 거주한 시간은 어언 10년이 훌쩍 넘어버렸다(룻 1:4). 만약 그곳에서 큰 화를 당하지 않았다면 이 가정은 그곳에 아예 눌러 앉았을 것이다. 이들은 하나님을 신뢰하기보다 당장 눈앞의 현실을 두고 타협을 하다가 결국은 망하는 길로 갔다. 

시편 1편은 이러한 타협의 마음을 이렇게 표현했다. “복 있는 사람은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시 1:1). 처음 악인의 꾀를 ‘따른다’는 표현이 나온다. 편법으로 일을 쉽게 해결하는 사람을 보고 그것을 한번 따라해 본다. 그러다 보면 다음 단계로 나아간다. 이제는 그곳에 머물러 ‘서게’ 된다. 죄와 편법에 익숙해지고 그곳을 떠나지 못한다. 마지막으로는 아예 그곳에 정착해 버린다. 시편 기자는 그것을 ‘앉는다’라고 표현한다. 따르다가 서게 되고 아예 그곳에 눌러 앉게 된다는 것이다. 처음부터 타협하지 않아야 한다는 점을 보여주는 것이다. 

타협하지 말 것을 가장 극명하게 말씀하신 것은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만일 네 손이나 네 발이 너를 범죄하게 하거든 찍어 내버리라 장애인이나 다리 저는 자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손과 두 발을 가지고 영원한 불에 던져지는 것보다 나으니라. 만일 네 눈이 너를 범죄하게 하거든 빼어 내버리라 한 눈으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눈을 가지고 지옥 불에 던져지는 것보다 나으니라”(마 18:8-9). 

아주 무시무시한 표현 같지만 처음부터 타협하면 안 된다는 것을 극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이런 과단성 있는 결단이 필요하다는 말이다. 왜냐하면 죄로 타락한 인간은 가만히 놔두면 더욱 죄악된 상태로 나아가기 때문이다. “범사에 헤아려 좋은 것을 취하고 악은 어떤 모양이라도 버리라”(살전 5:21-22). 

교회는 세상과 타협하지 않아 비난을 받지만, 정작 세상과 타협한 교회는 더욱 비웃음거리가 되고 세상의 거리에 짓밟혀 버려질 뿐이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 데 없어 다만 밖에 버려져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마 5: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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