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대인들은 아브라함을 ‘아버지’라 부르며 그의 자손임을 자랑해왔다. “우리 아버지는 아브라함이라”(요 8:39). 그들에게 아브라함은 하나님께 순종하여 하나님의 인정을 받은 대표적인 인물이었다. 그리고 자신들은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언약의 복들을 상속받은 ‘언약 백성’이요, 세계 모든 민족의 중심에 있다고 자부했다. 

 ‘아브라함의 자손됨’의 외적인 표시가 할례였다. ‘할례’는 남자 생식기의 포피를 잘라내어 언약을 몸에 새기는 의식이었다. “하나님이 또 아브라함에게 이르시되 그런즉 너는 내 언약을 지키고 네 후손도 대대로 지키라. 너희 중 남자는 다 할례를 받으라 이것이 나와 너희와 너희 후손 사이에 지킬 내 언약이니라. 너희는 포피를 베어라 이것이 나와 너희 사이의 언약의 표징이니라”(창 17:9-11). 

유대인들은 아브라함의 후손으로서 그 언약을 이어받아 할례를 행함을 자랑스러워했다. 반면 이방인들에 대해서는 ‘할례받지 못한 민족’이라고 경멸하고, 그들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고 생각했다. 

다윗이 목숨을 걸고 골리앗과 맞서 싸우겠다고 나선 이유는 이것이었다. “주의 종이 사자와 곰도 쳤은즉 살아 계시는 하나님의 군대를 모욕한 이 할례 받지 않은 블레셋 사람이리이까 그가 그 짐승의 하나와 같이 되리이다”(삼상 17:36). 

사울 왕이 전쟁 중에 부상하여 적에게 쫓기게 되었다. 자기를 보좌하는 시종에게 자기를 죽여달라고 했지만 머뭇거리자 스스로 자결한 이유도 여기에 있었다. “그가 무기를 든 자에게 이르되 네 칼을 빼어 그것으로 나를 찌르라 할례 받지 않은 자들이 와서 나를 찌르고 모욕할까 두려워하노라 하나 무기를 든 자가 심히 두려워하여 감히 행하지 아니하는지라 이에 사울이 자기의 칼을 뽑아서 그 위에 엎드러지매”(삼상 31:4).

그렇지만 할례가 곧 구원을 보장하거나 믿음의 증거가 되는 것은 아니다. 아브라함이 의롭다 여기심을 받은 것은 할례받기 이전이었다. 더구나 아브라함이 하나님 앞에 의롭다 여기심을 받은 근거는 하나님에 대한 그의 믿음이었다.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창 15:6).

아브라함은 무에서 유를 창조하고 불가능을 가능하게 하시는 하나님을 믿었다. 그는 나이 많아 늙어 이제는 자녀 생산과 관련해서는 죽은 몸과 같이 되어 도저히 후손을 낳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런데도 그는 약속하신 것을 반드시 이루실 수 있는 하나님을 믿었다. 무에서 유를 창조하시고 죽음에서 부활하게 하시는 그런 하나님을 믿었다. “기록된 바 내가 너를 많은 민족의 조상으로 세웠다 하심과 같으니 그가 믿은 바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으로 부르시는 이시니라”(롬 4:17).

무에서 유를 창조하시는 전능하신 하나님, 죽음에서 다시 살게 하는 부활의 하나님을 믿는다는 점에서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의 믿음과 아브라함의 믿음은 동일한 성격을 가진다.

그래서 아브라함의 진정한 자손은 유대인이든지 아니든 오직 하나님과 그가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해 보내신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이다.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는 말에는 이런 뜻이 담겨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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