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리/두/기. 코로나 팬데믹 이후 우리에겐 너무 익숙한 단어가 되어버렸다. 본래 거리두기란 어떤 이유 때문에 상대방과의 접촉이나 더 가까워지는 것을 의도적으로 회피하는 것을 의미했다. 그런데 코로나 바이러스 때문에 다른 사람과 물리적 거리를 두는 일이 국가의 강제에 의해 정해졌다. 

몇 인 이상은 아예 만날 수 없다거나, 몇 시부터는 안 된다거나, 그때그때 상황에 따라서 거리두기의 내용은 변경되었다. 1단계니 2단계니 3단계니 하는 말부터, ‘몸은 멀리 마음은 가깝게’라는 슬로건도 등장했다. 

심지어 명절에 가족들이 모이는 일까지도 제한을 받아야 했다.

그동안 명절이 되면 가능하면 모든 가족이 함께 모이려고 시간을 조정하곤 했었다. 그런데 코로나 전염병 이후론 서로 겹치지 않게 부모님 댁을 방문하려고 시간을 조정하는 ‘웃픈’ 현실을 맞았다. 

이런 코로나19 확산을 막기 위한 ‘사회적 거리두기’ 방역 지침이 지난 18일부터 해제되었다. 지난 2020년 3월 처음 도입된 지 2년 1개월 만이다. 그럼 이제는 정말 코로나 이전의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는 걸까? 마스크도 벗고 거리두기가 아닌 거리 두지 않기로 마음껏 만나고 함께 할 날을 기대해 본다. 

성경에서 거리두기와 관련한 몇 가지 에피소드가 있다. 야곱은 형 에게서 축복권을 가로챈 후 멀리 도망가서 살았다. 자수성가하여 고향땅으로 돌아올 결심을 한 그는 형의 복수가 두려웠다. 그래서 한 가지 묘수를 생각해 낸다.

혹시 습격을 받게 되면 모두 몰살될 위험을 피하기 위해 일행을 두 떼로 나누어 서로 거리를 두게 하였다. 습격을 받더라도 한쪽이라도 안전할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그것을 각각 떼로 나누어 종들의 손에 맡기고 그의 종에게 이르되 나보다 앞서 건너가서 각 떼로 거리를 두게 하라”(창 32:16). 우려와 달리 형제는 화해의 포옹을 한다. 거리두기는 필요 없었다.

예수님의 수제자 베드로는 유대 당국에 의해 체포되어 압송되는 예수님을 ‘멀찍이’ 따랐다. “베드로가 멀찍이 예수를 따라 대제사장의 집 뜰에까지 가서 그 결말을 보려고 안에 들어가 하인들과 함께 앉아 있더라”(마 26:58). 그가 거리를 두고 멀찍이 예수를 따른 이유는 예수님의 측근으로 지목되어 해를 당하지 않을까 두려워서였을 것이다. 그의 거리두기는 결국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하는 평생 후회할 일을 남기고 만다.

집나간 자식을 기다리던 아버지는 돌아오는 자식과의 거리가 먼데 그 거리를 단축시키기 위해 한걸음에 내달려 아들 가까이 다가섰다.

“아버지께로 돌아가니라 아직도 거리가 먼데 아버지가 그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니”(눅 15:20). 그는 사랑으로 거리두기를 좁혔다.

강제로 물리적인 거리를 둘 수밖에 없었던 때는 지나갔다. 각자가 서로에 대한 거리두기를 조정해야 할 때가 되었다. 거리를 멀리 할 것인가, 아니면 거리를 가까이 할 것인가? 이제 각자의 판단에 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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