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네 주변과 도로 곳곳에 꽃들이 만발했다.

지난 주말엔 그동안 코로나로 답답하게 갇혀 보냈던 시민들이 약속이나 한 듯 한꺼번에 거리로 쏟아져 나온 느낌이었다.

어디가나 사람들로 북적였다.

봄날이 가기 전, 꽃이 봄비에 지고 짙푸른 잎들로 덮이기 전 봄날을 만끽하려는 부지런한 발걸음이었다. 

팝콘을 튀긴 듯 피어났던 벚꽃은 이미 절정을 지나 서서히 푸른 옷을 입기 시작했다.

귀족의 풍모를 자랑하던 목련꽃도 땅바닥에 떨어져 처연하기까지 하다,

철쭉이 꽃망울을 틔우기 시작했다. 

연한 빛깔로 시작된 초봄을 지나 이제는 더욱 진한 색깔로 자연은 옷 입기 시작했다.

이렇게 추운 겨울은 가고 이른 더위까지 동반한 완연한 봄을 지내고 있다. 

겨우내 죽은 듯 잔뜩 움츠려있던 초목들이 하루가 다르게 물이 오르고, 꽃이 피어나고, 연둣빛 잎새들이 햇빛에 선명하다.

생명현상은 신비롭다. 특히 얼어붙어 삭막한 죽음의 그림자를 털어내고 새롭게 일어나는 봄의 그것은 더욱 그렇다. 

코로나로 지쳐있던 사람들에게 올 해 새봄은 유독 생명에 대한 갈망을 갖게 만드는 것 같다.

코로나의 정점은 지나가고 서서히 그 이후를 준비하는 때이다. 사회적 거리두기가 점점 완화되고 예전과 같은 일상회복에 대한 기대감을 가진다.

아직 벗지 못한 마스크에서도 해방될 날을 기다린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고난과 죽음을 앞두고 최후의 일주일을 보내는 고난주간을 맞이했다.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음은 죄인들을 대신한 것이었다. 그 십자가 고난 너머에는 찬란한 부활이 있다. 

예수 그리스도는 부활의 첫 열매이다. 그를 믿는 이들에게 부활 소망의 원형이다.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사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고전 15:20). 

한 알의 밀 알갱이가 땅에 떨어져 썩어질 때 비로소 그곳에서 새 생명의 현상이 일어난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요 12:24). 예수 그리스도의 죄인을 대신한 죽으심이 수많은 사람에게 새 생명을 선사하였다. 

겨울을 통과하여 새봄, 새로운 생명으로 부활하는 대자연에서 죽음에서 생명으로 일어서는 소망을 본다.

그리고 죽음의 그림자를 짙게 드리웠던 코로나 팬데믹을 극복하고 마스크에서도 자유로운 날을 그리듯, 우리를 두른 온갖 얽매임을 벗고 영혼의 자유를 누리게 될 날을 소망한다.

“예수는 우리가 범죄한 것 때문에 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시기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롬 4:25). 

고난주간은 죽음을 지나 부활의 날이 있으므로 소망이 있다.

죽음의 동토를 이겨내서 다시 일어서는 산천초목에서 보듯이 말이다.

죽음에서 생명을 꿈꾸는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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