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 마리의 양 가운데 길 잃은 양 한 마리를 찾아 나선 목자의 이야기는 그리스도인이 아니라도 어디선가 한번쯤은 들어보았을 것 같다. 이 이야기는 누가복음 15장에 기록된 예수 그리스도의 비유 중 일부이다. “(눅 15:4) 너희 중에 어떤 사람이 양 백 마리가 있는데 그 중의 하나를 잃으면 아흔아홉 마리를 들에 두고 그 잃은 것을 찾아내기까지 찾아다니지 아니하겠느냐”

이 비유를 읽으면서 한 가지 의문점이 있었다. 잃어버린 한 마리 양을 찾기 위해 나머지 아흔 아홉 마리 양을 들에 두는 것이 이치에 맞느냐는 점이다. 

그럼 한 마리 양이 나머지 아흔 아홉 마리보다 더 귀하다는 것인가? 더구나 그 길 잃은 양은 목자의 음성을 제대로 듣지 않고 한눈팔다가 딴 데로 갔을 가능성이 많다. 다른 양들보다 더 나은 것이 없어 보인다. 

그런데 왜 목자는 가던 길을 멈추고 나머지 양들을 들에 둔 채 한 마리 양을 찾아 나섰던 것일까? 그것은 목자가 그 한 마리의 양을 단순한 경제적 가치나 숫자로만 인식하지 않았다는 뜻이다. 

백 마리 중에 그래도 한 마리만 잃어버린 것이니 나머지 양들이나 잘 단속하자거나, 목자의 말도 잘 안 듣고 말썽피우더니 들짐승의 먹이가 되던, 구덩이에 빠져 죽던 상관할 바 아니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목자의 심정을 헤아려 알 수 있는 힌트를 요한복음 10장에서 찾아볼 수 있다. “양은 그(목자)의 음성을 듣나니 그가 자기 양의 이름을 각각 불러 인도하여 내느니라”(요 10:3). 밤새 양 우리에 가두어 놓았던 양들을 아침이 되어 풀밭으로 인도하기 위해 문을 열어 내보낼 때 목자는 양의 이름을 불러 인도하여 낸다고 했다. 

날마다 그 양을 돌보고 인도하는 목자는 양 한 마리 한 마리의 특성을 잘 파악하고 나름의 이름을 붙여 준 것이다. 모르는 사람들은 그저 많은 무리의 양들 가운데 하나일 뿐이지만 목자는 그 한 마리 한 마리를 양 1, 2, 3이 아니라 개별적으로 알고 구분을 해낸다는 말이다. 

“이쁜이, 재롱이, 먹보, 투덜이, 날센이...” 그 특성들을 알고 제 각각 이름을 부여했을 것이다. 그런데 그 양 한 마리가 길을 잃어 생사를 알 수 없게 된 것이다. 

목자는 단지 경제적 가치 때문이 아니라 위험에 처해 두려움에 떨고 있을 양이 못내 안타깝고 불쌍해서 찾아 나선 것이다. 

이 비유는 예수님이 죄인들을 환영하고 그들과 교제하는 것을 본 당시 종교지도자들의 비난에 대한 대답이었다. 예수님이 죄를 지어도 좋다고 하신 것이 아니라, 길 잃어버린 죄인이 멸망으로 가는 것을 안타까워하고, 그들이 회개하고 구원의 길로 돌아오기를 바라시는 사랑의 마음 때문이었다. 예수님을 비난 하던 종교지도자들도 사실은 길 잃은 양들이었다. 다만 그들은 그것을 깨닫지 못했다. 길 잃은 양, 가망 없는 인생을 구원하려는 하나님의 사랑은 독생자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 고난을 통해 구체화되었다. “나는 선한 목자이다.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린다.”(요 10:11). 기독교회는 지금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고난을 기리고 묵상하는 사순절의 시간을 보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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