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과 대기실은 마치 붐비는 터미널 대합실 같았다.  앉은 사람들은 의사에게 내 눈의 불편을 호소하는 짧은 만남을 위해 기다리고 기다린다. 

기다림이 지루해 옆 건물 다이소에 가서 빨래집게와 꽃무늬가 든 작은 그릇을 사고 다시 왔다. 돈이 많거나 적거나 바쁘거나 한가하거나 오직 내 눈에 집중해 모인 사람들 속에 나도 들어간다. 

젊은이가 보이지 않아 노인회관에 들어선 착각이 든다. 어떤 이는 다리까지 절룩이며 들어오고, 한 할머니는 이름을 불러도 대답을 안 하신다. 한참을 지나 일으서서 간호사에게 가서 “보청기를 집에 두고 와서 내 이름을 들을 수 없어요” 라고 설명하신다. 인생살이에 치열했던 닳은 몸들에 숙연하게 마주치며 구체적으로 나의 노년을 생각하게 되었다.

어느 날 아침 반닫이 서랍장 위에 놓인 엄마 얼굴 사진이 찌그러져 보여 내 눈을 의심한다. 글씨를 읽기 위해 양미간을 저절로 찌푸리니 피로한 인상이 걱정이다. 

사전을 보면 눈을 “빛을 수용하여 정보를 뇌에 전달하는 특수화 된 감각기관”이라고 정의하고 있다. 세상의 모양과 색에 반응하느라 지쳐 나자빠진 눈을 쉬게 하려 요즘은 멍한 시간과 함께 자주 눈을 감는다. 

생땍쥐베리가 어린왕자에서 “중요한 것은 눈에 보이지 않아” 라고 속삭였지만 보이지 않는 세계는 오랫동안 내게 호기심이었다. 상징과 비유에서 드러나는 숨은 세계가 있다고 믿었다.

젊은 날에 내 의견을 융통성 없이 고집했을 때 말 수 적은 어머니는 한마디 말씀으로 나를 꺾으셨다. “너도 늙어보아라!” 나의 늙음은 서서히 그리고 곧바로 현실로 나타나 닥쳐온 가을바람을 맞는 나뭇잎을 한 번 더 보게 된다.

코와 입가에 주름살이 길게 나면서 내 얼굴과 네 얼굴, 왠지 개성의 구분이 희미하다. 사용하는 말의 어휘 수도 줄었지만 말을 할 때는 단어를 골라 써야 한다는 생각이 문득 든다. 남에게 하는 말이 곧 자기에게 하는 말로 복선으로 다가올 때가 있다. 

“백내장이 찾아왔네요!” 의사의 진단으로 병을 알게 되었는데, 안경을 사서 쓰니 선명히 보이는 글자와 친구의 얼굴이 놀라웠다. 

눈만 내놓고 오고 가는 사람들의 눈동자들이 다시 보인다. 그리고 사거리 머리 위에는 카메라의 수많은 눈동자들! 

나를 위해 결명자 차를 끓여 마신다. 저 빛보다 더 깊은 초록 눈으로 오랫동안 당신을 바라 보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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