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를 ‘은혜의 종교’라고 한다.

죄인을 불쌍히 여겨 예수 그리스도가 그 죄 값을 대신하여 십자가에 죽게 한 하나님의 사랑을 말한다.

그런데 이 하나님의 은혜를 남발하고 악용하는 사람들도 있다. 

6일 동안 세상에서 온갖 죄를 짓고 살다가, 주일에 와서 회개하면 모든 것이 해결된다는 망상을 가진 사람들이다.

그들에게 6일 동안은 ‘죄일’(罪日), 일요일 하루는 ‘주일’(主日)이라는 생각이다.

이들은 짝퉁 신앙인들이다.

신앙을 이론적으로 배웠을 뿐 인격적으로 받아들이지 않은 사람들이다. 

누가복음 15장에는 가출하여 망가진 삶을 살던 방탕한 아들이 돌아왔을 때 사랑으로 감싸 안아주는 아비의 사랑에 대해 말씀한다.

그 사랑은 관계의 회복을 기대한다.

그런데 가출했던 자식이 기껏 돌아와서, ‘아! 내가 또 나가서 방탕하게 살다고 돌아와도 받아주겠네?’라고 생각을 한다면 얼마나 철없는 자식인가? 

하나님의 은혜를 개념으로만 받아들이고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관계를 생각하지 않을 때 이런 일이 벌어진다.

 인격이신 하나님이 죄 가운데 멸망할 자들을 불쌍히 여겨서 예수 십자가의 값비싼 대가를 치르고 구원해 주셨는데, 그 사랑과 은혜를 가볍게 여긴다면 얼마나 불효막심한 자식이겠는가?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고 산 과거의 삶을 뉘우치고, 이제는 순종하여 살려고 애를 쓰는 것이 당연하다.

때로 또 실수를 하더라도 그것을 정당화하는 것이 아니라 슬퍼하고 점점 더 죄와 멀리하는 것이 당연하다.

성경은 말한다.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롬 6:1-2).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넘쳤다고 하니, 죄를 더 지으면 은혜가 더 올 것이 아니냐는 궤변은 하나님과의 인격적 관계를 무시하는 것이다. 

죄인을 구원하는 십자가 복음에는 하나님의 기대가 담겨 있다.

단순한 죄 용서로 끝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출발점에 불과하며, 이제 선하신 하나님을 점점 닮아가서 세상에서 빛과 소금으로 살 것이다. 

세상에서 무례하고 이기적이고 거짓말과 속임수를 아무렇지도 않게 행하는 신앙인이라면 어찌 진정한 신앙인일 수 있겠는가? 은혜만능주의에서 벗어나야 한다. 

진정한 신앙은 여러 종교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것만큼이나 세상 속에서 그의 말과 행실이 ‘얼마나 하나님을 닮아 가느냐’에서 판가름 난다.

입술로만의 아멘이 아니라 삶으로 아멘이어야 한다.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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