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터에서 내가 하는 일은 치즈를 뜨는 일이다. 토핑 칸에 하얀 리코타 치즈 수천 개를 뜨고 바쁘게 일지를 쓰다 보면 하루가 강물처럼 흐른다. 

한 팀에서 일하는 여덟 명의 동료들은 서로 유기적으로 도우며 팀을 위해 생산에 충실한다.

나보다는 남을 생각하고 생산의 효율을 위하여 행동은 전투적이다.

쉬는 시간, 추위로 얼었던 몸들이 휴게실로 몰려든다. 마스크 쓴 사람들로 어울린 공간에서 15분 휴식을 얻어 뜨거운 커피를 마신다.

피로한 다리를 주무르고 대화라기보다는 눈빛과 손동작이다. 

휴대폰을 열어 ‘다음’ 기사를 읽는다.  제멋대로 우쭐대는 집값에 대한 기사는 기자가 생각을 하며 써야한다. 후세에 태어나는 아이들을 위하여 집값을 이렇게 어처구니없이 올리는 것인가?  비대하여 터질 자본주의는 당장 수정되어야 한다.  공평하지 않으면 불의다. 자본주의는 지금 불의의 편에 손을 들어주고 있다.  

오일 장날같이 부산스러운 작업장을 마무리하고 퇴근하는 시간, 회사 현관문을 열어 밖을 나오면 저 들 끝에 펼친 석양빛이 이토록 어여쁜지! 팍팍한 일상 속 순간 감동을 주는 연분홍 하늘빛이었다.  

자동차에 시동을 켜면 바로 라디오 채널 93.9에서 음악이 들린다. 비로소 나만의 공간과 시간을 맞이한다. 들려오는 기타 음률과 노래는 긴긴 하루의 노동을 충분히 위로해 준다.

겨울밤, 모자를 뜬다.  실뜨기는 실타래의 색감과 부드러운 감촉 그리고 따스한 느림을 지녔다. 배고픈 어린 날, 북풍의 추위를 견딜 수 있었던 것은 손끝에 느끼는 실의 감촉과 귤색 빛나는 실뭉치가 함께 있었기 때문이다. 

내 생에서 무엇이라 이룬 것들은 소멸을 위한다. 콩쥐가 이고 있는 물동이는 새는 물동이, 손으로 새는 물을 받치며 걸어와 부엌 물 항아리에 부을라치면 내가 먹을 수 있는 것은 몇 방울의 딸기 같은 것.

코로나에 뒤덮인 시간, 이불 속에 엎드려 딸기를 먹으며 문효치 시인이 쓴 ‘들꽃’을 읽는다. 질박한 자연에 하나가 되어 ‘작고 반짝이는 우아’를 외로이 누리는 겨울밤이다.

누가 보거나 말거나 피네

누가 보거나 말거나 지네

한마디 말도 없이

- 문효치의 시 <들꽃>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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