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가족들과 박물관 견학을 하였다. 백남준 비디오 아트가 있는 방에 들어갔는데 작은 아들이 귀가 아프다고 했다. 전자기기에서 들리는 소음 때문이란다. 그런데 나는 그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특별히 소음이 들리지 않는데 왜 귀가 아프냐고 하니, 아빠는 저 소리가 안 들리느냐고 반문한다. 큰 아이도 그 소리가 들린다고 옆에서 거든다. 

그리고 나에게 하는 말이 나이가 들면 못 듣는 주파수 대역이 있단다. 그것을 확인시켜줄 양으로 아이는 나에게 스마트폰 앱으로 주파수 음역대를 들려주며 이 소리가 들리느냐고 묻는다. 

내가 들을 수 있는 음역대가 아이들보다 좁았다. 이전 어디선가 한번은 들어본 적이 있는 것 같기도 한데, 정작 내 현실이 되니 좀 씁쓸하기도 했다. 

   ‘청력나이’라는 게 있다. 20대는 듣는 음역대가 굉장히 높은 반면, 나이가 많을수록 높은 음에 대한 감지능력이 점점 떨어진다. 그래서 고주파를 못 듣는 것이 노화의 증거라고 한다. ‘오빠’와 ‘아저씨’는 소리로도 구별할 수 있다고 한다. 

청력나이와 관련하여 인터넷 검색을 해보니 청력나이를 젊게 하는 기기를 홍보하는 기사들이 많았다. 그만큼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서서히 시력저하와 더불어 청각저하도 오나보다. 이래 저래 나이가 들어간다는 것을 실감하는 기회였다. 

그런 저런 생각을 하다, 어디 귀가 밝고 시력이 좋다고 다 좋기만 할까 하는 지점에 이르렀다. 세상을 살아가면서 우리는 못 볼 걸 보게 되고, 안 들었으면 좋겠는 걸 들으며 살기도 한다. 세상에는 시끄러운 소리가 많다. 온갖 험담과 상처주는 말들, 날카로운 음성들은 안 들어도 될 것 같다. 안 봐도 될 만한 광경들도 많다. “내가 저런 꼴을 보려고...”하는 그런 것들. 어쩌면 때로는 적당히 귀를 막고, 눈은 반쯤 감고 사는 것이 편하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인체의 청력나이와 상관없이 사람마다 각자 민감한 소리도 있다. 나이를 불문하고 귀를 쫑긋 기울이며 자세히 들으려고 하는 소리가 있다. 내가 듣기 좋아하는 말, 내가 듣고자 하는 말은 무엇일까? 반대로 내가 누군가에게 꼭 들려주고 싶은 말은 없는가? 

때론 상대방의 소리 없는 말에 더 귀 기울여야 한다. 말하지 않으면 잘 모르는 남모를 아픔과 상처를 가진 사람이 내 주위에 있을지도 모른다. 지금 자신의 무언의 소리를 들어주기를 원하는 사람은 없는가?

주변 사람들의 말을 민감하게 잘 들어주는 사람이 진정으로 건강한 청력나이를 가지고 있다. 난청으로 고생하는 사람들이 청력 개선을 위해 치료와 처방이 필요하듯, 우리는 마음의 소리를 듣는 연습과 훈련도 필요하다.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너희가 알지니 사람마다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 하며 성내기도 더디 하라”(약 1:19). 마음을 잘 듣는 귀가 지금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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