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주의(nationalism)는 국가를 구성하고 있는 모든 나라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으로 국내적으로 혹은 국외적으로 그것이 표현된다. 국내적으로는 민족의 단합과 단결을 통해 국가의 힘을 강하게 하는데 사용되며, 대외적으로는 독립 혹은 자신의 영향력을 외부로 팽창시키는 모습을 가지고 있다. 

한국이 일본의 식민지로 고통받을 때 민족의 지도자들이 주장한 것이 바로 우리 민족이 일치단결하여 외세를 몰아내고 독립을 쟁취하자는 것도 민족주의를 기반으로 하고 있었다. 우리뿐만 아니라 제국주의 시기에 고통받던 많은 민족들이 독립을 염원하면서 외세에 저항하였다. 

민족주의의 또 다른 얼굴은 팽창과 다른 국가들에 대한 영향력을 확대시키는 것이다. 1차세계대전이 발발한 것도 민족주의에서 시작되었다. 당시 오스트리아는 게르만족 중심주의를 외치면서 주변의 국가들을 식민지화하고 있었다. 세르비아도 강제로 오스트리아의 지배를 받고 있었고 이에 저항하는 세르비아의 민족주의 청년이 오스트리아 황태자를 암살함으로서 1차 세계대전이 시작되었다. 

당시 독일과 오스트리아를 중심으로 하는 게르만 민족주의와 러시아와 그 주변 국가들의 슬라브 민족주의의 충돌이 도화선이 되었다. 

독일의 황제는 오스트리아에게 백지 수표를 주었고 오스트리아는 강대국이던 독일을 믿고 전쟁을 일으켰으며 이에 러시아와 프랑스가 동맹을 맺고 독일에 대항하면서  세계의 전쟁으로 확산된 것이다. 

이렇게 민족주의는 야누스의 얼굴처럼 상황에 따라 시시각각으로 변화되고 있다. 최근 중국에서는 시진핑이 중국의 꿈을 이야기하면서 중국의 민족주의를 강조하고 있다. 그 강조는 단순히 말로만 끝나는 것이 아니라 사회 곳곳에 그 사상을 주입시키고 있다. 

한국전쟁 중에 김일성의 부탁을 받고 스탈린의 지령을 받은 모택동이 엄청난 수의 ‘항미원조’의 중국군을 한반도에 파견하였다. 이때 북한의 장진호에 매복해있던 중국군이 미군을 포위하여 큰 타격을 주었고 한반도 통일이 좌절되었다. 바로 ‘장진호 전투’이다.  

미군을 비롯한 유엔군 약 3만명은 장진호를 중심으로 북쪽으로 진격하고 있었다. 이때 모택동이 전쟁에 참전하겠다는 경고를 날렸으나 이를 믿지 않았고 심지어는 무시하고 있었다. 약 15만명에 달하는 중국군이 드디어 장진호에서 포위하여 공격을 하였고 방심했던 연합군은 엄청난 피해를 보았다. 결국 함경도로 후퇴한 후 흥남부두에서 철수를 하여 한국전쟁의 새로운 전개가 시작되었다. 

장진호 전투 후 70년이 지난 지금 중국에서는 ‘장진호’라는 이름으로 재소환되고 있다. 

중국에서 장진호 전투의 영화가 중국 역사상 가장 높은 수익을 올린 영화가 되었고 그 내용의 대부분은 미군과의 전투장면이며 미국과 맞서서 싸우던 중국의 젊은 군인들이 죽어가는 모습을 담고 있다.   

이 영화는 상영시간만 3시간의 장편으로 제작되었고 여기서 내용의 핵심은 중국 공산당 기관지인 인민일보를 통해 언급되고 있다. 인민일보는 “인민 군대의 뜨거운 애국심과 당과 인민에 대한 충정을 보여준 영화”라고 극찬하면서 “중국의 주권, 안보, 이익을 확고하게 지키고 중국은 그 어떤 경쟁자도 두려워하지 않는다”라는 민족주의를 강조하였다. 

트럼프와 바이든, 그리고 시진핑의 미중간 경쟁과 갈등이 오버랩되는 순간에 등장한 이 장진호 영화를 본 중국인들이 감동의 눈물을 흘리고 거수경례를 하는 모습이 중국의 언론을 통해 보여진다.  

미중간의 갈등과 경쟁속에서 중국인들의 마음을 하나로 묶는 민족주의의 대표적인 영화가 바로 장진호이다. 

그러나 우리의 입장에서는 남침으로 시작된 한국전쟁이 중국의 개입으로 무산되었고 그 이후 70년을 남북분단을 겪고 있는 계기가 장진호 전투라고 생각하면 마음 한편이 많이 무거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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