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0년대와 80년대 한국이 수출입국을 국가의 정책으로 설정하고 대기업들이 해외 진출을 위해 전세계를 향해 뛰고 있었다. 그 중 중국의 남쪽에 있으면서 동남아시아로 진출하는 길목에 홍콩이 위치하고 있었다.   

  홍콩은 영어로는 Hong Kong이라고 쓰고 중국어로는 ‘샹강(香港)’으로 발음하고 한자로는 향기로운 항구라는 뜻이다. 중국의 명나라 시기에 이 지역에서 생산된 향나무 제품이 침사추이에서 광저우와 소주, 항주로 팔려나갔는데 이때부터 이 지역 사람들은 향기나는 항구라는 뜻으로 ‘샹강’이라고 불렀다.  

  이후 영국이 홍콩을 침략했을 때 홍콩섬에 도착한 영국군은 스탠리마켓이라고 하는 곳에서부터 진출하였다. 이때 이 지역에 살고 있던 사람들을 앞장세워 홍콩섬의 중심에 이르렀는데 그 마을 사람들이 홍콩이라는 단어를 사용했고 이후 영어로 홍콩이 되었다. 

  홍콩은 비록 중국 땅이었지만 오랫동안 영국의 식민지 지배를 받았다. 영국이 중국과의 무역을 하면서 적자의 폭이 커지자 아편을 밀수 했고 그 당시 중국인 중 약 400만명이 아편에 중독되었다. 당시 청나라 정부는 이를 막기위해 임칙서라는 대신을 광동성에 파견했고 결국 영국은 군함을 앞세워 중국을 침략했다. 

  청나라와 영국은 1842년에 남경조약을 체결했는데 그 내용중에 홍콩섬을 영국에게 할양하는 내용이 담겨있었다. 영국의 입장에서 홍콩은 아시아로 진출하는 길목에 있어서 전략적으로 매우 중요한 위치에 있었다. 영국은 처음에는 홍콩섬만 요구했으나 나중에는 다시 제2차 아편전쟁을 거치면서 홍콩섬과 그 주변의 땅을 포함하여 할양받았다. 

  1898년 새롭게 맺어진 영국과 청나라간의 협정에는 홍콩섬과 부속된 235개의 섬, 그리고 구룡반도와 신계 지역을 합쳐서 99년간 영국이 통치한다는 내용이 담겨있었다. 이후 홍콩은 영국의 식민지로 있다가 1997년 7월에 중국에 반환되었다. 아편전쟁이 있었던 1842년부터 계산한다면 약 150년간을 영국의 지배하에 있었다. 

  영국 식민지 기간 동안 홍콩은 중국과는 완전히 다른 정치 경제제도를 구축했다. 영국은 홍콩을 자유무역항으로 개발했고 경제적으로는 완전한 자본주의 형태를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한국과 많은 국가들이 홍콩을 동아시아 금융의 중심지로 그리고 무역의 허브로 이용하였다. 한국의 기업들도 홍콩에 사무실을 내고 국제무역을 진행했고 그래서 홍콩에 출장을 가는 기업인들은 ‘메이드 인 홍콩 제품과 면세품들을 가지고 한국에 돌아오기도 했다. 

  중국이 1978년 개혁과 개방을 하면서 초기에는 홍콩의 중요성이 더욱 돋보이기도 했다. 한국을 비롯한 많은 외국 기업들이 홍콩을 통해 중국에 투자를 시작했으며 중국 시장 진출을 위한 교두보로 홍콩을 활용하였다. 

  그러나 홍콩의 반환 시점이 점차 다가오면서 향후 홍콩에 대한 처리 문제가 대두되었고 이를 위해 당시의 등소평과 영국의 대처 정부간에 협상이 시작되었다. 1984년 드디어 양국은 홍콩을 향후 50년간 현재의 체제를 그대로 유지한다는 ‘일국양제’의 원칙에 합의를 하였다. 등소평 시기에는 ‘홍콩특별행정구’법을 제정하였고 홍콩의 체제를 존중한다는 정책을 유지하였다. 

  그러나 시진핑 정부가 들어서면서 그 정책이 변화하기 시작했다. 즉 중국 중앙정부의 홍콩에 대한 간섭이 본격화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2014년 9월 홍콩의 최고 지도자인 행정장관의 선출을 민주적인 선거에 의해 중국 정부의 간섭을 배제하기 위한 시위가 시작되었다. 홍콩 경찰이 시위대를 향해 최루탄과 물대포를 사용하자 시위대는 이를 막기 위해 우산을 사용하기 시작했고, 이때부터 홍콩의 시위를 ‘우산혁명’이라고 불렀다. 이 시위의 초기에는 대학생과 지식인들이 중심이었으나 점차 규모가 확산되어 중고등학생과 일반 시민들이 참가하는 대규모 시위로 전개되었다. 이 시위는 결국 해산되었지만 중국의 중앙정부는 더 강한 간섭을 결심하였고 시위대는 지속적인 시위를 결심하는 계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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