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가 코로나와 금융 인플레로 한창인 지금 중국에서 19차 전당대회 제6차 중앙위원 전체회의가 개최되었다.

그 회의에서 주목할 만한 내용이 발표되었는데 ’역사결의‘이다. ‘역사결의’라고 하는 것은 중국내에서 커다란 변화, 즉 중국 전체에 영향을 줄 수 있는 대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중국에서는 ‘역사결의’가 오직 두 번만 있었다. 첫 번째는 1941년부터 준비하여 1945년에 통과하였다. 1945년의 역사결의는 일명 모택동의 역사결의라고 한다. 

1944년 5월부터 임필시가 주도하고 유소기, 강생, 주은래, 장문천 등 당시의 혁명원로들이 참가하여 공산당의 역사문제 결의 준비위원회를 구성하였다. 

모택동도 직접 이 회의에 참석하였고 그 내용들을 수정한 적이 있다. 

그 내용의 첫째는 교조주의를 타파하는 것이었다. 중국 공산당의 혁명과정에서 소련의 경험을 중국에 그대로 적용하는 교조주의를 타파하였고 중국의 상황에 맞는 혁명모델을 찾았다는 것이다. 

둘째는 중국 공산당 스스로의 지도사상을 확립하고 소련 공산당으로부터의 독립자주의 길을 간다는 것이었다.

셋째는 국민당의 공산주의에 반대하는 것에 대한 통일전선전술을 형성하고 마르크스 사상을 중국에 맞도록 운용한다는 것이었다. 

  모택동의 역사결의의 원래 제목은 “약간의 역사문제에 관한 결의”였고 그 내용의 핵심은 중국 공산당의 독자노선의 강조와 모택동의 권력과 지위를 확고히하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그리고 두 번째의 역사 결의는 등소평때 만들어졌다. 등소평 시기의 역사결의는 1981년 6월에 발표되었는데 그 제목은 “건국 이래 공산당의 약간의 역사문제에 관한 결의”였다. 

모택동의 역사결의가 중화인민공화국 수립과 관련이 되어 있다면 등소평의 역사결의는 사회주의 건설, 즉 중국 특색의 사회주의 체제를 확립하는데 그 목적이 있었다. 

등소평은 이 역사결의를 주도하였으며 개혁개방의 방침을 확립하고 사상에서의 해방을 강조하였다.

 또한 모택동 시기의 대약진운동과 문화대혁명으로 핍박받거나 억울하게 숙청된 인물들을 회복시켜야 한다는 내용도 담고 있었다. 

이 결의는 등소평과 호요방이 주도했으며 그 내용은 크게 두가지 부분으로 구성되었다. 

첫 번째 내용은 중국 혁명이 공산당을 중심으로 28년간 이루어졌으며 신민주주의 혁명의 승리를 설명하고 있다. 

즉 핵심은 중화인민공화국이 수립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공산당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는 것을 강조한다. 

  두 번째 내용은 중화인민공화국 수립이후 사회주의 개조의 승리에도 불구하고 사회주의 건설에 있어서 서로 모순이 발견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중국의 사회주의 경제발전은 반드시 중국의 상황에 맞추어 실천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동시에 모택동 사상과 모택동을 분리했고, 모택동의 공로와 과오에 대해서도 평가를 진행했다. 

여기서 모택동은 70%의 공로와 30%의 과오를 저질렀다고 평가하여 일명 ‘삼칠제’ 가 등장했다. 

등소평이 역사결의는 중국의 경제 및 정치구조 전체에 대한 변화를 가져왔고 개혁개방의 필요성을 강조하기 위해 작성되었다.  

역사적으로 모택동과 등소평의 각각 1회씩 했던 역사결의가 시진핑 집권 2기를 지나면서 다시 등장했다. 2021년 11월 11일에 발표된 시진핑의 역사결의는 국내외적으로 다양한 평가를 받고 있다. 

이번 역사결의는 “ 중국공산당 중앙의 100년간의 공산당의 중요한 성과와 역사적 경험에 관한 결의”라는 긴 제목을 가지고 있다. 

  그 내용은 모두 3만6천자로 구성되어 있는데 그 중 시진핑이 권력을 잡은 이후의 내용이 1만9천자로 반을 넘고 있다. 시진핑이 권력을 잡은 이후 중국은 소강사회를 이루었고 역사적인 성취를 했으며 이것은 역사적인 변화이다라고 강조하고 있다. 

  결국 이 세 번째 역사결의의 핵심은 시진핑의 권력과 지위를 공고히 할 것임을 국내외에 천명하고 있다.

 문제가 되는 것은 시진핑의 집권 연장을 위해 대외정책이 더 강경해질 것이란 예측이 나오기 때문이다.

 미중간의 갈등속에 있는 한국은 중국의 더 공격적인 대외정책을 맞이할 준비를 해야 할 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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