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진타오는 등소평에 의해 이미 낙점을 받아놓은 상태에서 권력을 이어받았기 때문에 자신의 특별한 정치적 기반이 없었다. 중국에서 고위직에 오르기 위해서는 부모의 후광이 상당히 중요했으나 그는 이 부분에서는 취약할 수 밖에 없었다. 후에 자신이 권력을 잡은 후에 공산주의 청년단 출신을 대거 등용하여 자신의 세력으로 삼았다. 

후진타오 이전의 등소평과 강택민은 성장과 발전을 국가목표의 최우선으로 설정했다. 등소평은 개혁과 개방에서 “일부의 사람들이 먼저 부자가 될 수 있다”는 선부론(先富論)을 주장했다. 선부론은 중국의 발전 초기에 모두 함께 잘 살수는 없고 일부의 사람들이 먼저 잘 살 수 있다고 허용한 정책이다. 

또한 강택민도 ‘삼개대표론’과 ‘사회주의 시장경제론’을 주장하면서 중국적 자본가들을 대거 공산당에 유입하여 경제적 성장에 초점을 맞추었다. 그러나 후진타오가 등장할 무렵에는 이러한 고도성장의 부작용으로 빈부의 격차가 확대되면서 공산당의 정체성에 대한 위기감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후진타오를 중심으로 한 제4세대 지도부는 2002년 16차 전당대회에서 중국이 샤오캉(小康)사회로 진입하기 위해 “사회는 보다 조화롭게 움직여야 한다”라는 조화로운 사회주의 건설을 표방하기 시작했다. 

원래 조화로운 사회라고 하는 것은 중국이 전통적 유교에서 나오는 대동사회(大同社會)에서 유래되었다. 공자가 만들어낸 유교의 학설에서 대동(大同)은 모두가 함께 잘 어울려 살 수 있는 곳으로 이상적인 삶의 형태를 의미한다. 

후진타오는 강택민이 주장한 “신자유의적 시장사회에 반대하고 사회적 평등과 정치적 조화를 추구하며 빈곤을 감소시키고 부패를 척결하려고 하였다. 그가 말하는 조화로운 사회는 사회주의 내에서 모순이 존재하고 있고 이 모순들을 해결해야 후진타오 자신의 집권에 있어서 정당성을 확보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가 주장한 ‘조화로운 사회질서’는 크게 여섯 가지로 개념화를 할 수 있다. 사회주의 민주정치, 공평정의, 신뢰와 우애, 충만한 활력, 안정적 질서, 인간과 자연의 조화이다. 이를 실현하기 위해 사회주의 법치 건설과, 법에 따른 인민의 권익보장, 지역격차의 해소 및 수입분배 구조의 개선, 가정소득 증진을 통한 국민 생활의 향상, 취업 확대와 사회보장체제 확립을 강조했다. 

동시에 국민에 봉사하는 정부건설, 국민의 사상도덕과 문화적 소질 함양, 혁신형 국가 건설, 사회관리체제의 개선과 사회질서의 향상, 생태환경의 개선 등 다양한 계획을 제시하거나 제안하였다. 

그가 설정한 이러한 목표들은 강택민 시기의 성장 일변도에서 탈피하여 계층적, 지역간 불평등을 해소하고 경제발전 과정에서 소외된 계층들에 대한 공정한 보호에 초점을 두고 있음을 알 수 있게 한다. 

또한 후진타오는 ‘중화의 위대한 복원’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였다. 이 말은 후에 시진핑이 이야기하는 위대한 중화민족의 부흥과는 다른 차원의 의미이다. 그가 말하는 내용은 평등하고 평화로운 세계를 추구하는 것이며 이를 위해서는 중국의 민족주의가 더 강화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실제로 후진타오 시기에는 강택민과 달리 노동자에 대한 상대적 보호 민족자본의 육성, 사회적 약자에 대한 배려, 사회적 빈부 격차를 줄이는 노력, 당내 민주주의의 확대 등을 발전시켰다. 

그의 기간 동안 2008년 북경 올림픽과 2010년 상하이 세계 박람회를 성공적으로 마쳤으며 제 3세계에 대한 중국의 영향력도 확대되었다. 그러나 그 기간 동안 2008년 세계금융위기로 국제 질서가 타격을 받자 중국은 그 위상이 올라갔으며 후진타오와 공산당은 ‘조화로운 사회’를 강조하면서 국민들을 하나로 묶는 민족주의를 강화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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