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택민은 양주 출신이고 그의 기본적인 정치활동의 무대는 상하이였다. 중앙에서 등소평의 개혁개방 정책과 경제특구를 설립하는데 참여하면서 등소평과 공산당 원로들의 눈에 들었고 긍정적인 평가를 받고 있었다. 

1980년에서 1983년까지 상하이는 아직 개방정책의 세례를 받지 못했고 발전 속도도 빠르지 않았다. 당시 상하이시 시장은 왕도함(汪道涵)으로 임기가 다되었고 후임자를 물색하고 있었다. 이때 중국의 부총리였던 만리(萬里)가 왕도함에게 후임자를 추천하라고 하자 강택민을 추천했고 1985년 상하이시 시장이 되었다. 

그는 시장이 되자 기자회견을 열어 상하이의 발전계획을 선포했다. 상하이의 인프라를 강화하고 대외개방을 확대하여 중국 최고의 도시를 건설하겠다는 것과 이를 위해 새로운 지역을 건설하겠다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그가 발표한 ‘상하이 전체 계획도’에는 포동지역이 포함되었다. 포동지역은 우리가 상하이를 방문하면 반드시 가는 동방명주탑이 있는 곳으로 상하이 뿐만 아니라 중국에서 가장 번화하고 발전한 곳이다. 특히 뉴욕의 맨하탄과 같이 고층빌딩과 금융업이 발전되어 있으며 2010년 상하이 세계 박람회도 개최하였다. 

  1986년 중국의 국무원은 강택민의 계획대로 상하이를 아시아 최고의 산업과 무역도시로 만들겠다고 선포했다. 그가 시장을 하면서 영국의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을 맞이하였고 독일의 사회당 총서기 등 수백명의 외국 인사들을 접견하면서 그의 보폭을 넓혀갔다. 특히 등소평은 매년 설날을 상하이에서 보냈는데 이때 등소평의 강택민에 대한 능력에 높은 평가를 하였다. 

1986년 12월에 많은 대학생들이 중국의 개혁개방의 속도가 너무 느리다는 항의와 시위를 벌였고 동시에 민주와 경제적 자유화에 대한 요구가 분출되었다. 상하이도 그 영향을 받아 약 10개의 대학 학생들이 도처에서 시위를 벌였다. 이에 강택민은 상하이 체육관에서 공산당 대회를 개최하여 시위를 막을 것을 요구했고 상하이는 질서를 회복했다. 

1987년 그는 중국 공산당 상하이시 서기로 승진했고 그는 상하이시 대표단을 이끌고 광동성을 시찰하여 광동성의 성공경험을 토대로 상하이의 개혁개방을 더욱 강하게 추진했다.  중국은 만 63세가 되면 정계에서 은퇴를 해야 하는 내부 규정에 따라 강택민은 현역에서 물러나 어떤 직책도 맡지 않고 상하이 교통대학교의 교수가 되었다. 그는 대학에서 ‘에너지 발전의 추세와 에너지 절약 시책’의 논문도 발표하는 등 정치계를 떠나 교수로서 제2의 인생을 설계하고 있었다. 

그 와중에 1989년 4월 15일 전 중국공산당 총서기였던 호요방이 병으로 사망하자 다음날 북경대학의 학생들이 천안문 광장에 모여들기 시작했다. 그들은 공산당의 부패를 비난하고 민주와 언론의 자유를 요구했다. 이 시위는 빠르게 상하이로 번져갔고 화동사범대학도 시위에 참여하였다. 

상하이시는 이를 억제하려고 노력하였으나 실패하였고 학생들은 단식에 돌입했다. 수천명의 시민과 학생들이 데모에 참여하였고 그 규모는 점차 커져 약 450명의 학생들이 단식을 시작했고 10만명이 넘는 인파가 시위에 참여하고 있었다. 

1989년 5월 20일 등소평과 중국 공산당 원로들은 회의를 거쳐 당시 총서기이던 조자양을 대신해서 강택민을 총서기로 임명하기로 결정했다. 그는 즉각 북경으로 불려와 등소평을 면담했으며 통지를 받았다. 

북경의 시위대는 군대의 무력진압을 통해 진압되었으나 강택민은 무력을 동원하지 않고 상하이의 시위를 진정시켰다. 이를 통해 등소평과 원로들의 강택민에 대한 신뢰는 더욱 높아졌고 1989년 7월 정식으로 강택민을 제3세대 지도 핵심으로 하는 집단 지도체제가 완성되었다. 원래는 퇴직하고 대학의 강단에서 평생을 마칠 그였지만 중국의 정치적 풍파가 그를 중국의 최고 통치권자의 자리에 올려놓는 순간이었다.

저작권자 © 평안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