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개혁파의 리더는 등소평이었지만 그 밑에 있던 호요방은 보다 급진적인 개혁을 주장하였고 국민의 자유에 대해 더 많은 개방을 주장했었다. 그는 비록 중국 일반 국민들의 지지를 받았으나 한편 원로들의 미움을 받았다. 그의 죽음이 촉발한 것이 바로 1989년의 6.4 천안문 사건이었다. 이 사건은 현재의 중국 정부가 민주화 운동으로 인정하지 않지만 등소평이 중국의 지도자로서 가장 큰 오점이 되었다. 

누군가에게는 위기이지만 또 누군가에게는 기회가 되기도 한다. 바로 강택민은 천안문 사건의 소용돌이 속에서 갑작스럽게 발탁되어 중국의 등소평의 뒤를 잇는 제3세대 지도자가 되었다. 

강택민의 조상은 중국의 유명한 상인들 집단으로 알려진 안휘성에 살았고 이후 할아버지때부터 강소성의 양주(揚州)로 이사해서 살았다. 양주는 중국의 대운하가 지나는 길목에 있어 상업이 발달했고 물산이 풍부했던 지역이다. 

이곳에서 1926년에 출생한 강택민은 어릴적에는 장사하던 할아버지 덕분에 부유하게 살았으나 후에는 경제적으로 어려워졌다. 그럼에도 다른 공산주의자들과는 달리 초중고와 대학까지 무난하게 학업을 마칠 수 있었다. 1943년 남경에 있던 중앙대학교 전기공학과에 입학했고 재학 시절에는 청년구국단 등 다양한 학교내의 동아리 활동을 하였다.   

1945년 9월 일본이 패망한 후 중국공산당이 조직한 학생 데모에 참여하면서 공산당과 인연을 맺게 되었고 1946년 4월 정식으로 중국 공산당에 가입했다. 1947년에는 상하이의 명문 대학인 국립교통대학에 다시 편입을 하였고 이때부터 공산당의 국민당에 반대하는 시위에 수차례 참가하였다. 

졸업 후 그는 상하이에서 당시 유명했던 아이스크림 회사의 전기 기술자로 취업을 하였고 당시 보기 드문 냉장시설을 관리하였다. 국민당과 공산당간에 내전이 벌어지자 국민당은 이 회사를 몰수 하였는데 자신의 신분을 숨기고 계속 업무를 수행했다. 이후 1949년 공산당이 상하이로 진격하자 자신의 신분을 밝혔고 공장내 공산당 위원회 대표와 설비실 주임을 맡았다. 

이후 그는 이 회사의 총경리가 되었고 25세가 되었을 때 상하이시 산하의 중국비누공장 부공장장이 되어 국유화 사업을 책임지고 완수했다. 이후 1954년에는 새롭게 설립된 장춘의 제일자동차로 부임을 하였고 약 700명의 기술자들과 함께 소련의 모스크바에서 훈련을 받았다. 귀국 후에는 제일자동차의 동력부 부처장 및 당지부 서기를 맡았다. 

모택동이 죽고 문화대혁명이 종식되면서 강청(모택동의 부인)등 ‘사인방’이 상하이에 근거를 두고 중앙정부에 대항하려고 할 때 이를 해결하기 위해 대표단이 파견되었는데 그 구성원 중에 강택민도 포함되어 있었다. 

상하이의 일을 잘 처리한 공으로 그는 북경으로 와서 기계부 외사처 처장이 되었다. 1979년 4월 등소평이 경제특구를 건설하면서 국무원에서는 특별히 수출입관리위원회와 외국투자관리 위원회라는 부서를 조직했다. 이때 두 위원회의 부주임을 맡고 있던 왕도함이 강택민을 추천하여 부주임과 비서장으로 임명되었다. 그는 광동성과 복건성에 대한 특수 정책과 경제특구 실시를 위한 작업을 책임지고 실행했다. 그가 작성한 ‘광동성 경제특구조례’는 국무원의 허가를 비준받았고 국가의 법률로 정식으로 경제특구가 탄생되었다. 

1982년 중국 정부는 기구개혁을 단행하여 대외경제무역부를 설치했는데 이때 같이 만들어진 전자공업부 제1차관에 임명되었고 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 위원이 되었다. 그 다음해에는 전자 공업부 장관이 되었으며 중국 전자공업발전의 기초를 닦았다. 또한 이전에 중국에서 표준으로 삼던 소련식 기준을 국제기준으로 변화시켰고 1984년에는 장정3호라는 위성을 성공적으로 발사시켜 동방홍2호 통신위성을 우주괘도에 안착시키는 성공을 이루었다. 그의 노력과 성공은 당시 등소평으로 하여금 그를 눈여겨 보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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