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안문 사건은 등소평과 당시의 중국 정국을 주도하던 개혁파에게는 하나의 충격이었다. 비록 무력으로 진압을 하고 사회적 안정은 유지하였으나 정권 내부에서는 균열이 발생하기 시작했다. 

천윈(陳雲) 등의 보수파는 천안문 사건의 배경이 궁극적으로 등소평의 개혁개방이 국민들에게 지나치게 자본주의를 개방했기 생긴 사건이라고 공격하였다. 특히 천윈의 ‘새둥지 경제론(鳥籠經濟)을 주장하면서 개혁개방은 사회주의라는 틀 속에서만 움직여야 하고 이를 벗어날 경우 중국의 사회주의가 훼손 된다고 하면서 당시의 등소평의 당권파를 압박하였다. 

등소평은 이러한 내부적 공격에 대해 1989년 천안문 사건 이후 1991년까지 ’정비정돈‘이라는 전략적 선택을 통해 소극적 개혁개방 정책을 실시하였다. 이 3년의 기간 동안 등소평과 개혁파는 보다 신중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1989년부터 시작된 동유럽에서의 사회주의 몰락, 동서독의 통일과 베를린 장벽의 붕괴, 그리고 1991년 소련의 해체는 중국에 강한 위기감을 조성했다. 등소평은 만약 중국이 이러한 국제 정세의 변화를 돌파할 새로운 계기가 마련되지 않는다면 중국의 공산주의 체제도 언제든지 붕괴될 수 있다고 판단했고 이를 해결할 대책을 강구하게 되었다. 

등소평의 결론은 중국이 잠시 주춤하던 개혁개방의 폭과 속도를 더 확대하는 것이라는데 도달했다. 등소평은 중국이 공산당이 중심이되어 사회주의 체제를 유지하는 것에는 변함이 없어야 하지만 자본주의의 장점을 흡수해 새로운 형태의 중국의 사회주의 구조를 완성해야 중국의 미래를 보장한다고 생각했다. 그의 이러한 생각은 등소평의 뒤를 이은 강택민 시기에 접어들면서 중국 사회주의 시장경제론으로 완성하게 된다. 

또한 보수파와의 대립에서 더 이상 혁명 원로들을 정책 결정에 참여시켜서는 안된다는 판단을 하였다. 보수파들은 쉽게 얘기하면 개국공신과도 같은 지위를 누리고 있지만 이들이 사사건건 정책에 개입하고 관여할 경우 정권을 담당한 자들이 국가 운영에 영향을 받는다고 판단했다. 

등소평은 이러한 문제를 한꺼번에 해결 할 수 있는 방안을 모색했는데 바로 남순강화였다. 남순이라는 말은 청나라 시기 강희제와 건륭제가 북경을 떠나 대운하를 거쳐 남쪽을 순시했던 것에서 나왔다. 강희제와 건륭제는 여섯차례에 걸쳐 남쪽을 순시하고 청나라의 안정을 꾀한 경험이 있다. 

등소평은 1992년 1월 18일에서 2월 21일까지 약 5주간에 걸쳐 중국의 경제 특구인 심천과 주채, 광주, 무창, 상해 등의 지역을 시찰하였고 이 기간 동안 자신의 의견을 발표하였다. 이 등소평의 남쪽 시찰을 가리켜 남순강화라고 하였다. 

그의 남부 지역 시찰은 단순한 방문이 아니라 중국 정책에 있어서 새로운 전환기를 마련하는 기틀을 만들었다. 

그는 중국 최고의 권력인 공산당 중앙 군사위원회 주석의 자리를 내놓았고 자신과 같은 원로는 이제 물러나고 새롭게 유능한 보다 전문성을 갖춘 젊은 사람들이 권력을 장악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의 2선 후퇴는 다른 보수파의 원로들도 함께 물러나도록 하였다. 

또한 중국이 실시하고 있는 개혁개방이 더욱 힘을 실어 추진되어야 잘사는 중국을 만들 수 있다고 믿었고 비록 천안문 사건이 있었지만 더 크고 더 많은 개방이 중국이 나가야 할 방향이라고 주장했다. 

약 5주간에 걸친 등소평의 남순강화는 중국의 발전에 새로운 전기를 마련했다. 침체되었던 경제적 개혁개방이 다시 힘을 얻기 시작했고 90년대 중국은 세계의 공장으로 발전하는 동시에 연간 10%의 경제적 성장을 이룩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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