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은 내게 지난 날 시골 풍경에 대한 향수를 자극한다. 초등학교 5학년 때 도시로 이사 온 이후에도 도시 외곽에는 시골 풍경이 남아있었다. 하지만 어린 시절 시간만 나면 산과 들녘에 나가 놀던 기억은 도시로 이사하기 전까지가 더 선명했다. 

가을 하늘은 정말 눈이 부실 만큼 파랬다. 그 파란 하늘을 바탕으로 피어난 코스모스가 바람에 산들거리고, 그 위를 선회하는 고추잠자리에는 여유로움이 묻어났다. 길가에 널어놓은 빨간 고추는 강렬한 햇빛에 더 붉어 보였다. 

가을 운동회는 어린 시절 가을의 최대 축제였다. 학교 운동장을 수놓은 만국기는 뭔가 대단한 행사가 벌어진다는 암시와 같았다. 운동장에 들어선 순간 잔칫날을 예감했고, 동네 사람들이 여기 다 모여 있는 듯했다. 진정 마을의 축제였다. 큰 확성기로 들려오는 명랑한 동요 노래가 흥을 돋웠다. 청군과 백군으로 나누어서 응원전을 펼쳤다. 청색과 백색의 띠를 머리에 두른 아이들은 장애물 경기와 이어달리기, 박 터트리기, 줄다리기 등을 했다. 끝나고서는 공책을 선물로 받았다. 학교 운동장에서 먹는 점심은 꿀맛이었다. 간식으로 단감과 사과와 삶은 밤을 먹었다.

가을 소풍은 주로 인근 산으로 떠났다. 특별한 것은 없었다. 소풍에 빼놓지 않고 하는 개인 장기자랑이나 도시락 까먹기 정도다. 무엇보다 소풍의 제 맛은 보물찾기였다. 부지런히 몇 장을 더 찾아서 다른 아이에게 나누어주었을 때의 관대함에서 나오는 뿌듯함이란! 소풍날이면 어김없이 찾아오는 장사꾼들이 있었다. 각종 모양의 갱엿을 전시해놓고는 돈을 내면 뽑힌 번호의 엿을 가져가게 하는 장사꾼 아저씨도 있었다. 물론 대부분은 꽝이었다. 나의 흥미를 끌었던 것은 얼마의 돈을 내고 두 개의 끈 중에 긴 것을 고르면 상품을 주는 아저씨였다. 확률은 반반! 꾀 큰돈을 가지고 갔던 나는 호기롭게 그 뽑기에 내기를 걸었다. 할 때마다 짧은 것을 골랐다. 사실은 속임수였다. 나중에 아저씨는 미안했는지 장난감 권총을 선물로 주셨다. 

가을에 빼놓을 수 없는 것은 추석 명절이었다. 추석이 되면 새 옷을 선물 받았다. 명절에 먹는 잡채와 부침개, 홍어 무침은 별미였다. 오꼬시(밥풀과자)나 검은깨 강정도 명절에 주로 볼 수 있는 맛이었다. 물건을 파는 상회에는 나무로 된 사과 궤짝이 쌓였다. 문방구에는 콩알 탄이나, 화약총이 불티나게 팔렸다. 여기저기서 “타다닥 탁!” 터지는 소리에 아이들은 신이 났다. 가난했지만 추석은 풍요로웠다. 

가을의 날들을 지나면서 다시 한 번 옛 생각을 펼쳐내 보았다. 요즘 아이들도 분명 그 나름의 추억을 간직하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과연 아름다운 자연과 고향에 대한 짙은 ‘노스텔지어’(nostalgia)도 있을까? 참 좋은 가을의 시간이 이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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