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소평이 중국에서 권력을 잡은 후 시행한 개혁정책과 개방정책이 중국과 중국인에게 새로운 삶의 활력소가 되었고 경제발전의 기초가 되었다. 그의 정책은 크게 ‘흑묘백묘론’과 ‘선부론(先富論)’에서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흑묘백묘론은 원래 자신의 고향이던 사천성 속담에 ‘흑묘황묘론’이 있는데 이를 차용해서 사용했다. 그 의미는 “검은 고양이던 하얀 고양이던 쥐를 잘잡는 고양이가 좋은 고양이다”라는 뜻이다. 등소평의 실용주의적인 사고는 사회주의와 자본주의의 이데올로기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중국의 경제발전과 국민들의 삶의 질을 높일 수 있는 것이 좋은 정책이라고 귀결되었다. 

일반적으로 자본주의 이론의 원형으로 아담 스미스의 국부론을 많이 언급한다. 국가나 정부가 시장에 개입하지 않고 그대로 두면 자본주의는 스스로의 자율성에 의해 그 국가의 경제를 발전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한편, 사회주의는 자본주의에서는 부자가 가난한 노동자와 농민을 착취하는 구조로 간주한다. 그러므로 노동자들이 혁명을 일으켜 자본주의를 타도하고 국가가 직접 계획에 따라 분배하여 평등한 사회를 이룩해야 한다는 것이다. 

역사의 경험에 비추어보면 자본주의는 유럽을 중심으로 자연발생적으로 생성되었기 때문에 조금씩 변화의 과정을 거쳐왔다. 1929년 미국의 대공황이 발생했을 때 케인즈 경제학과 같이 국가가 시장의 영역에 개입하여 안정을 유지하기도 했다. 

한편 중국은 모택동 시기에 교조적인 마르크스 이론을 그대로 답습했고 유연성을 발휘하지 못해 경제가 파국으로 치달았다. 이후 등소평이 이를 극복하기 위해 내놓은 것이 흑묘백묘론이다. 

등소평은 자본주의도 시장(市場)에만 의존하지 않고 국가가 개입하는 계획이 있듯이 사회주의도 단순한 계획이나 분배가 아니라 시장적인 요소를 도입할 수 있다는 것이다. 등소평의 시장적인 요소라는 것은 사회주의의 틀을 깨지 않는 범위내에서 개인 소유, 즉 사유제를 허용하는 것이었다. 등소평의 이론은 사회주의라는 틀 속에서 자본주의적 요소를 일부 인정하는 중국만이 가지는 ‘중국특색의 사회주의’로 완성되었다. 

흑묘백묘론과 동시에 주장한 것이 선부론(先富論)이다. 등소평은 중국의 10억이 넘는 인구가 한꺼번에 잘 살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그는 우선 일부의 사람들이 경제적으로 성공을 하면 그 효과가 다른 사람들에게도 파급이 되어 궁극적으로는 다 같이 잘 살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우선 외국과의 교류가 활성화될 수 있는 동남 연해 지역을 먼저 개방했다. 4개의 경제특구와 14개의 연해개방도시를 설치하였다. 등소평의 개방정책에 따라 우선 화교를 중심으로 하는 자본들이 중국 시장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화교의 투자가 어느 정도 성과를 이루자 외국의 기업들이 하나씩 둘씩 중국 시장에 진입하기 시작했고 터닝포인트(turning point)를 지나자 그 규모는 급격하게 증가했다. 

이 과정에서 연해지역의 경제는 빠르게 성장했고 그 지역에 사는 사람들에게 혜택이 돌아갔다. 또한 개혁개방의 주체 세력이던 공산당과 관련된 인물들이 외국기업과 연계되어 가장 먼저 부자가 되었다. 등소평이 말한 선부론이 실현되기 시작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 안에 새로운 함정이 도사리고 있었다. 

원래 등소평의 계획은 능력있는 사람들이 먼저 부자가 되고 나머지 사람들을 도와 다 같이 잘사는 나라를 만드는 것이었다. 그러나 실제로 부자가 된 많은 사람들은 능력 보다는  특권층들이었다. 또한 연해지역의 발전에 비해 내륙지역은 여전히 경제적으로 낙후되어 상대적인 박탈감도 동시에 가중되고 있었다. 이러한 사회적 불만은 가난했지만 평등했던 모택동 시기가 더 낫다는 자조적인 말들도 등장하게 했다.

등소평의 정책이 절대적인 빈곤으로부터 중국인들을 구제한 것은 사실이지만 동시에 상대적인 박탈감도 점차 커지게 하였다. 그 불만은 지식인들과 청년층에게 상실감이 쌓이게 하였고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간폭탄이 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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