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소평이 권력을 잡은 중국은 새로운 세상을 맞이하고 있었다. 1949년에서 약 30년동안 철저한 계획과 분배의 어두운 이데올로기의 틀 속에서 깨어나기 시작했다. 등소평의 정책은 매우 간단했다. 가난이 사회주의나 공산주의가 아니라는 것이다. 사회주의라는 틀 속에서 자본주의적인 요소를 가미하여 중국 특색의 사회주의라는 이론을 완성하였다. 

등소평은 국가의 목표를 현대화로 설정했다. 비록 사회주의라는 이름을 덧씌우고는 있지만 결국 국가 경제를 발전시켜 중국인들에게 굶주림을 해결하고 더 잘 살 수 있도록 하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 개혁과 개방정책을 실시했다. 모택동의 계급투쟁이나 혁명이 아닌 실용주의적인 노선을 경제정책에 접목시켰다. 

등소평은 비록 공산주의자였지만 교조적이거나 편협한 사상에 빠지지 않고 공산주의와 자본주의를 새롭게 해석하여 국가의 발전에 도움이 될 수 있는 정책을 실시했다. 그 대표적인 것이 바로 개혁이고 개방이다. 개혁정책은 지난 30년간의 계획경제에서 벗어나 농민과 노동자들에게 잉여 생산물을 개인이 소유할 수 있도록 하였다. 즉 공산주의에서 혐오하던 사유제를 과감히 허락한 것이다. 

이후 중국에서는 너나 할 것 없이 크던 작던 간에 자신의 가게를 만들기 시작했다. 원래 중국인들은 세계 3대 상인에 속할 정도이니 목말랐던 고기가 물을 만난 것과 같았다. 길거리에는 ‘개체호(개인 사업가)’라는 허가증을 걸어놓고 포장마차와 좌판을 하는 사람들이 쏟아져 나왔다. 그들의 표정에는 이제 뭔가 꿈을 꾸고 미래를 가질 수 있다는 희망과 자신감에 넘쳐 있었다. 

동시에 농민들도 토지에서 생산한 것의 일부를 자신이 소유할 수 있도록 하자 생산량이 빠르게 증가했다. 자신의 생산량에 관계없이 일부만 분배받던 시기에는 서로 일하지 않는 것이 습관화 되어 있었으나 이제는 완전히 다른 양상을 띄게 되었다. 

중국 경제발전에 촉매제가 된 것은 개방을 통한 외부 세계와의 연결이었다. 명나라와 청나라 그리고 모택동의 시기에 이르기까지 폐쇄성을 가지고 있던 중국이 이제 세계 시장에 정식으로 문을 연 것이다. 

등소평은 중국의 남쪽 바닷가 지역들부터 하나씩 잠겨있던 대문을 열기 시작했다. 먼저 홍콩과 붙어있던 인구 2만의 작은 어촌 마을인 심천을 개방했다. 또 마카오와 접경을 이루던 주해도 개방하여 화교와 외국 자본들이 중국 시장에 진입할 수 있는 교두보를 만들었다. 

매우 재미있는 것은 당시 적대적인 관계에 놓여있던 타이완을 겨냥해 하문도 개방했다. 하문은 대만의 금문도를 마주 보고 있고 이전에 포격으로 유명한 곳이기도 했다. 등소평은 중국의 경제발전에 있어서 처음부터 서양인들이 중국에 투자할 것이라는 기대는 하지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화교와 대만의 투자가 우선될 것이라 판단하고 심천, 주해, 하문, 산두를  개방했다.

등소평이 최초로 개방한 이곳들을 가리켜 4개 경제특구라고 했다. 1979년에 개방된 이곳에서 성공을 거두자 이제 자신감을 얻어 1984년이 되면서 연해지역을 중심으로 14개의 도시들을 이어서 개방했다. 이제 중국의 개방은 점에서 선으로 연결되었다.  

중국의 개방은 초기에 화교들이 홍콩을 통해 중국에 투자하기 시작했고 중국 정부는 다양한 혜택을 부여했다. 중국은 연해지역에서 벗어나 내륙 지역도 개방에 박차를 가했고 전국이 해외투자를 유치하기 위해 동분서주했다. 

중국은 이제 점에서 선으로 그리고 면으로 개방이 확대되었고 세계의 기업들과 자본이 중국으로 밀려오기 시작했다. 중국은 값싼 노동력과 미래의 거대한 시장으로 탈바꿈하면서 세계 기업들이 눈독을 들이는 지역이 되었다. 한국의 경우도 1992년 8월 국교수립을 하면서 노동집약적 기업들이 중국으로 대거 이전하기 시작했다. 

우리와 가까운 산동지역과 동포들이 많이 사는 동북3성이 투자의 대상이 되었다. 지금은 많이 줄었지만 산동성의 청도와 위해, 연태 등이 한국 기업이 중국으로 진출하는 발판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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