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세기의 중국은 이전의 중국과는 다른 모습을 보이고 있다. ‘NO라고 할 수 있는 중국’, ‘할말은 하겠다는 중국’ 여러 가지 수식어가 중국은 세계의 공장이라는 단어를 대신하고 있다. 

지금의 중국은 일본과 독일을 제치고 미국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G2(Great of Two)국가로 성장하였다. 1992년 한중수교시의 한국을 환대하고 한국인을 좋아하던 중국은 이제 찾아보기 어렵다. 심지어 미국과의 대결을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오늘날 중국을 이렇게 경제적으로 그리고 군사적으로 강력한 힘을 가지게 된 배경은 무엇일까? 바로 등소평이란 인물에 대해 포커스를 맞출 수 밖에 없다. 

등소평은 1904년 청나라의 운명이 풍전등화였던 시기에 사천성 광안이란 곳에서 출생했다. 그는 당시 아버지가 지주였기 때문에 가난은 겪지 않았고 성격도 원만해서 누구와도 잘 어울리곤 했다. 

1920년 상하이에서 배를 타고 유럽으로 건너갔으며 여기서 일하고 공부한다는 의미의 근검공학 시절을 보냈다. 그는 파리의 르노 자동차 회사에서 노동자로 일하면서 1924년 중국 공산주의 청년동맹 유럽지부에 가입했고 붉은 태양이라는 잡지를 출간했다. 

이때 주은래를 만나 형으로 모시면서 그를 추종했고 1926년에는 소련의 모스크바에 있는 중산대학교에서 공부하였고 1927년 중국으로 귀국했다. 그는 중국에 귀국한 후 모택동과 함께 혁명에 동참했다. 

국민당의 공격으로 대장정에 참여했을 때 모택동은 그를 아껴 공산당 비서장으로 임명하여 옆에 두었다. 2차세계대전이 끝난 후 공산당 중앙위원이 되었고 정무원 부총리 및 다양한 직책을 역임하였다. 그러나 모택동이 대약진 운동에 실패하고 개인의 권력에 몰두하자 그와 거리를 두고 유소기의 실용주의 정책을 지지하였다. 

모택동이 문화대혁명을 일으키면서 등소평은 중앙에서 물러났고 당직에서 은퇴했다. 이후 1976년에는 큰 아들이 홍위병에 쫓겨 건물에서 추락하여 평생 하반신이 마비되는 장애인이 되었다. 한때 등복방은 중국 장애인 협회 회장을 하면서 한국을 방문하기도 했다. 

1976년 모택동이 사망하고 1978년 다시 중앙의 권력으로 복권하면서 중앙 군사위원회 부주석을 하였고 모택동의 후계자였던 화국봉을 몰아내고 명실상부한 권력의 정점에 서게 되었다. 

등소평은 권력을 잡은 후 중국을 중국인들이 잘살 수 있는 국가로 만들어야 한다는 원대한 계획을 세웠다. 바로 4대현대화로 농업, 공업, 국방, 과학에 있어서 현대화를 통해 중국을 부강한 사회주의 국가로 만들겠다는 계획이었다. 

이를 위해 등소평은 개혁과 개방을 실시했고 외교에 있어서도 포용적이고 타협적인 태도를 취했다. 미국과 중국의 관계 개선에 걸림돌이 되었던 대만문제를 중국이 양보하면서 1979년 1월 1일 미중 국교수립을 이끌어냈다. 또한 한국과의 관계에서도 ‘문은 닫혀있지만 잠겨있지는 않다’라는 말도 남겨 한중간의 관계 개선에도 여지를 두었다. 

국내적으로는 농촌개혁과 도시개혁 등을 주도하여 경직된 사회주의의 틀을 깨뜨렸고 외교적으로도 모택동의 계속혁명론과 무장혁명론을 과감히 포기하고 자본주의 국가와의 관계를 개선하는 개방정책을 주도했다. 

중국에서는 그를 향해 개혁개방의 총설계사라는 별명을 붙였다. 그의 정책은 빠르게 가시적 성과를 거두기 시작했다. 중국은 매년 10%의 경제성장을 이루었으며 심천과 같은 개방 도시는 중국의 어느 곳보다 빠르게 성장했다. 중국인들의 삶은 점차 윤택해졌고 국가의 종합국력도 향상되기 시작했다. 

이러한 국력의 성장에 힘입어 지금의 시진핑은 미국과 세계를 향해 강대한 중국과 중화민족의 부흥을 외치고 있다. 중국의 발전에 있어서 가장 역동적인 시기와 정책을 실시한 등소평은 지금도 중국에서 가장 존경받는 지도자로 손꼽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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